“누군가가 보고 있어. 당신은 누구시죠?”
애매모호하고 형태도 없는 알아차릴 틈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주머니 속의 연기.
이 이야기는 실체가 없다. 주머니에 넣었다고는 하나, 어쩌면 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 그곳에 한 명의 임산부가 등장한다. 이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상당히 큰 배로 보이는 큰 주머니를 목에 걸고 있다. 만삭이다.
출산의 고통. 크고 무거운 배가 그녀를 힘들게 하고 체력을 앗아간다.
'내보내자, 내보내자' 라는 노래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달려나가자, 생각해 나가자, 튀어나 가자' 출산준비에 돌입한 여성의 자리로
한 팀의 남녀가 나타난다.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두 사람,
남자는 자상한 모습으로 아이를 받을 위치에 섰다.
필사적으로 힘을 주는 임산부. 괴로워하며 소리를 지르고 마침내
배에 달린 주머니에서 한 권의 책이 태어난다.
남자는 그걸 받아 들고 정중한 손놀림으로 펼쳐서 안을 들여다본다.
안도의 숨도 잠시, 다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임산부, 쌍둥이인 걸까.
계속 계속 태어난다. 태어난 아이들 모두….주머니 속에 있다.
이제부터 이야기를 진행해 갈 도구들이다. 뭉실뭉실한 주머니 속 남자는
하나하나 소중히 받아 들어 또 한 명의 여자에게 건넨다.
책을 보고, 누군가의 지시를 읽는 것처럼 전달한다.
여자는 지시대로 도구를 배치하면서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출산에 지쳐 죽은 것처럼 쓰러진 임산부는 연기.
책의 세계에 몰입해버린 남자는 책벌레,
도구를 배치하고 그 세계에서 노니는 여배우.
그런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꿉놀이.
가족이 흩어지고 학교가 붕괴되고
세상이 혼돈으로 가득 찬 이 시대.
<주머니 속의 연기>는 사라짐에 대한 젊은 사색의 연극이다.
한 소녀의 내적 독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연극은
세상 속에서 살다가 사라지는 인간이라는 존재,
극장을 떠돌다가 사라 져버리는 연극.
한 순간 존재했으나 결국 사라지는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를
연극적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연극의 연극' (메타드라마)이다.
“세상은 무대요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우리는 어쩜 세상이라는 주머니 속에 살아가는
연기와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작가 호키모토 게이코는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젊은 극작가, 연출가이며 배우이다. 일본의 권위있는 희곡상 치카마쓰몬자에몬상近松門左衛門 우수상 수상한 신진 연극인으로서 이 작품은 일본의 동시대 젊은 연극은 어떤 모습인가를 국내 관객에게 보여준 작품이다. 이 공연은 ‘사라짐’을 주제로 한다. 작품은 한 소녀의 내적 독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세상 속에 살다 결국 사라지는 인간의 존재를 ‘연극 속의 연극’으로 풀어낸다. 극 중 등장하는 연기, 여배우, 책벌레 세 인물은 '연극놀이'를 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연극이 무대 위를 떠돌다 막이 내리면 사라져 버리는 점과 죽음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이 같다는 점에 착안했다. 세 사람은 놀이 속에서 아기로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며 죽음을 맞이한다. 순간순간 벌어지는 이런 상황들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현실은 실체를 증명할 수 없기에 이 점이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역설한다.
작가의 글 - 호키모토 게이코
담배연기를 비닐 봉지에 넣어 보관하고 싶었다
어릴 적에 담배 연기 고리가 금방 사라지는 것이 싫어서 실제로 담배 연기 고리를 비닐 봉지에 담아 보관하려고 했었다. 담배 연기 고리를 그대로 비닐 봉지에 넣어서 보관했는데 그 다음 날 열어보니 냄새밖에 남지 않았다. 이 세계라는 것, 현실이라는 것, 연극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 모든 것이 이 연기처럼 실체를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존재하는 듯 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연기와 같은 것이라고. 어릴 때 작은 주머니에 여러 물건들을 집어넣고 밖에 나가서 노는 걸 즐기는 아이였다. 그 속에서 물건을 끄집어내어 소꿉놀이도 할 수 있었다. 실제 무대에서도 처음엔 봉지가 아니라 소도구 전부를 하나의 봉지에 넣어 배 쪽에 달고 나오도록 해봤다. 하지만 보기에도 좋지 않았고 도구들도 필요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봉지라는 건 어릴 적 여러가지를 넣어 들고 다니던 그 주머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어머니(일본어의 '후쿠로'라는 말은 봉지라는 의미로도 남자들이 자기 어머니를 부를 때 쓰는 말로도 쓰인다)의 자궁이며 세계이고 연극이다. 거기서 끄집어내어 소꿉놀이를 한다. 연극을 만든다. 이야기 주머니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현실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것은 바로 현실이란 게 실 체를 증명할 수 없는 세계라는 걸 보여준다. 그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체를 증명 못하는 현실이다.
1980년 6월 7일, 오사카출생 극작가 연출가, 시인
2005년 오사카예술대학 대학원 예술제작 연구과 동태예술분야 동태표현무대 수료,
같은 해, 처녀작 희곡 '메가쿠시카구레'로 제3회 치카마쓰자에상 우수상 수상
2008년 3명의 전단원이 연출·출연을 맡은 '극단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창단
2012년 2월, 제2회 일한 연극페스티벌 '코마치후' 출연을 계기로
연출가 이윤택, 그리고 한국과의 만남이 시작됨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즐겁고 익살스럽고 생기있는연극 창작이 목표.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토퍼 고어 '뮤지컬 페임FAME' (2) | 2024.09.15 |
---|---|
뒤렌마트 개작 '원형 파우스트' (3) | 2024.09.15 |
롤란트 시멜페니히 '황금용' (10) | 2024.09.13 |
뮤지컬 '삼총사' (4) | 2024.09.08 |
수전 글래스펠 '억압된 욕망' (4) | 2024.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