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기호 '덴빈'

clint 2024. 2. 25. 10:27

 

 

'덴빈'은 '저울'이라는 뜻의 일본어이고 태풍 이름이다.

 

먼 바다의 외딴 섬 추도(秋島)에 자리 잡은 작은 의원에 낯선 손님 

김재훈이 찾아온다. 그는 미국의 저명한 의과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다. 

고향인 섬에서 탈출하는 것이 소망이었으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간호사 박막순은 원장의사인 김무영을 찾아 섬으로 들어온 재훈이 궁금하기만 하다.

막순이 자신을 짝사랑하는 섬 청년 장영복과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어느덧 날은 저물고, 재훈은 한반도를 향해 스멀거리며 다가오는 태풍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발이 묶이게 된다. 막순이 환자를 돌보러 간 사이,

부자지간인 무영과 재훈은 17년 만에 상봉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먹하기만 두 사람의 사이엔 긴장감이 흐르고

그것은 세월 탓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하루가 저문다.
다음날, 막순은 재훈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 깊은 골이 부자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재훈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어느덧 태풍은 섬을 덮쳤다. 그러나 작은 의원 안에도 또 다른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무영과 재훈 사이에서 의사로서 지녀야 할 가치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사이,

환자들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영복은 다리를 다쳤고,

마을의 노인은 배를 움켜쥐고 찾아온다. 무영과 재훈이 환자를 함께 돌보며

환자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대조를 이룬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그렇게 잠시 태풍이 잦아드는가 싶었지만, 

그것은 태풍의 눈에 불과했다. 지적장애를 안고 심한 순환장애를 앓고 있는 

홀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는 섬 청년 심정구가 어머니를 업고 나타난 것이다. 

응급상황에서 재훈은 지나칠 정도로 흥분하며 환자를 살리기 위해 의지를 불태운다. 

무영의 반대를 무릅쓰고 극단의 처방을 내리는 재훈. 

혈전용해제 때문에 정구母는 피를 흘리며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다시 혼수상태가 된다.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뒤로 남겨진 재훈과 무영은 드디어 그들 사이를 17년 동안이나 갈라놓았던 문제를 

드러내며 격렬하게 대립한다. 순환장애가 있던 재훈의 어머니 또는 무영의 아내... 

의사인 무영은 정작 자신의 아내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 채 다른 환자를 돌봐왔었고, 

재훈은 이에 대해 큰 상처를 갖고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무영의 오랜 친구이자 추도에 요양원을 짓고 여생을 보내고 있는 허회장이 

의원에 홀로 남아있는 재훈을 찾아온다. 그는 재훈母의 유골단지를 들고 와 

무영이 얼마나 사무치게 아내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죄책감에 괴로워했는지를 말해준다. 

재훈은 자신의 상처만 보느라 아버지의 상처에 대해 무심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 또다시 태풍이 의원 안으로 들이닥친다. 

정구가 피를 흘렸던 제 어미를 보고 의사인 무영이 죽인 것이라 착각하고는 

무영을 끌어안고 절벽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어 의원으로 업혀 들어온 두 사람. 

재훈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두 환자 가운데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무영과 대립했던 자신의 가치관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저울질이기도 하다. 그렇게 태풍은 마음의 섬에도 불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태풍과 같은 시기를 맞는다. 거센 비바람에 몸을 가눌 수 없고,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태풍이 휩쓸고 간 이후에 더욱 청명한 하늘을 만나듯 우리의 삶은 태풍을 극복하고 더 찬란해질 수 있다. 윤기훈의 '덴빈'은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젊은 남녀들을 중심으로 삶과 사랑에 대한 치열한 분투를 보여준다. 태풍이 몰아닥치는 남쪽의 외딴섬 추도에 미국에서 온 젊은 의사 김재훈이 나타난다. 그의 출현은 마치 '태풍의 눈'과 같다. 태풍의 눈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엄청난 바람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게 된다. 섬의 유일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박 막순'에게는 그에 대한 연정이 싹트고 오랫동안 그녀를 짝사랑해온 '장영복'은 심한 불안과 질투에 사로잡힌다. 극 초반에 김재훈의 존재는 매우 모호성을 띄다가 병원의 원로 의사인 '김무영'의 아들임이 밝혀지면서 이들의 삶을 뒤흔드는 태풍은 점점 그 위력을 더해간다. 김재훈이 17년이나 미국에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와 연관되어 있음이 암시된다. 극 후반에 그것은 결국 아버지가 다른 환자를 돌보느라 죽어가는 어머니를 방치했다는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박막순을 중심으로 한 김재훈과 장영복의 삼각관계, 김재훈과 김무영부자의 애중관계가 이 작품의 중심 갈등이라면 이들의 주변에는 중심 갈등을 더욱 위태롭게 만드는 부수적 갈등이 맴돌고 있다. 정신지체자인 '심정구'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심정구는 병원 의사가 엄마를 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 이 모든 갈등의 소용돌이는 결국 태풍의 절정에서 동시에 최 정점에 달한다. 엄마의 죽음에 쇼크를 받은 심정구가 김무영을 안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두 중환자 사이에서 김재훈은 누구를 먼저 치료해야 할지 촌각을 다투는 갈등에 빠진다. 김무영은 가망이 없는 자신보다 심정구를 먼저 살리라고 아들을 설득하면서 ''환자의 생명을 두고 저울질 하지 마라” 고 충고한다. 의사에겐 “'인간적인 정”보다 "냉철한 이성”이 필요하며 "의사 앞에 모든 생명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김재훈은 심정구의 수술에 돌입하면서 비로소 과거에 위중한 어머니를 두고 다른 환자에게 달려갔던 아버지를 완벽히 이해하게 된다. 의사 김무영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아들 김재훈과 환자 심정구의 '오해'는 서로 쌍둥이처럼 겹쳐져 있다. 그 오해는 그들의 젊은 날을 더욱 깊은 방황과 절망의 늪으로 빠뜨렸다. 그러나 냉철한 이성으로 무수한 생명을 구해 온 김무영의 위대한 사랑은 김재훈을 태풍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주변의 인물들에게도 건강한 삶을 선사한다. 
그로부터 3년 후, 마지막 장면은 밝은 분위기 속에 삼각관계에 있던 김재훈과 박막순과 장영복이 너무도 친밀한 관계로 나타나고 화사한 분위기의 '여인'이 새롭게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두 쌍의 부부이다 작가는 두 커플의 짝짓기를 관객들에게 수수께끼로 남겨 놓았다. 탄탄하고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덴빈'은 '잘 짜여진 구성'(well-made play)의 전형을 보인다. '저울'이라는 뜻의 일본어인 '덴빈'의 상징성을 집요하게 마지막까지 끌고 가 극적인 클라이맥스와 감동적인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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