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익훈 '자전거를 타는 소년과 이제는 시를 쓰지 않는 시인들'

clint 2024. 1. 30. 15:55

 

 

나는, 알고 보니, 이제야,

내가 무엇인지 모르는 걸 조금 아는 것 같습니다.

소년은 어느새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었다.

아무것도 안 된 채 중년이 된 소년은 한겨울 깊은 밤

홀로 강 얼음 위로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목구멍에 바람이 들어와 숨을 못 쉴 때까지.

시인이 꿈이었던 소년, 시인은 결국 되지 못하고,

중년이 되어 연극을 하게 된다.

소문이 어떻게 났지?

사람들이 어떤 연극이냐고 물어보면,

소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연극이라고 말한다.

 

 

 

제목이 긴 <자전거를 타는 소년과 이제는 시를 쓰지 않는 시인들>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시적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지문과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자전거 타는 소년은 시 쓰기를 멈춘 대신, 
자신과 이제는 시를 쓰지 않는 시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연극을 쓴다. 
시를 쓰지 않던 시인들은 끝끝내 시 그 자체가 되어 나아간다.
예술에 고통받는, 삶에 고통받는 불안한 이들을 시와 연극의 언어로 보듬는다.
<위대한 개츠비>, <이방인>을 비롯한 다양한 시와 문학을 차용해 만드는 운율이 아름답다.

다만 작가가 작품 전면에 드러난 것이 희곡의 말들에

진정성을 더해주는 동시에 작가와 희곡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작가가 극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놓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작가의 말 - 이익훈

창작 의도에서 의도, intention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 속의 생각이나 계획. 사전에서 의도를 찾아봤습니다. 나는 나를 하고자 했나. 몸에서 사라진 시를 찾으려고 했나. 잘 모르겠습니다. 분노였는지 욕심이었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는데, 한때 너무 많은 관계를 헤맸습니다. 사람 물건 문학, 그것들이 내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깨달음에 몸이 녹을 때까지 걷기도 했습니다. 좀 속상해 대파 썰며 울기도 했습니다. 의도는 아직 모르는 척하고 싶은데, 이건 조금 아는 것 같습니다. 엄마한테 꾸중 듣고 놀이터에서 혼자 오래 있다가 찬 밤에 떨며 집에 돌아갔는데, 엄마가 그냥 안아준 기분입니다. 따뜻합니다.

이익훈

 

2023 <식빵을 사러 가는 소년>으로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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