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경헌 '서재 결혼시키기'

clint 2024. 2. 1. 06:10

앤 패디먼의 에세이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제목을 가져왔단다.

 

 

 

성주의 아내 해원이 자살한 지 일 년이 지났다.

성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해원이 죽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차라리 해원이 혼자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느낌에 가까울 것이라고 설명한다.

심리상담을 전공한 수영은 성주에게

감정을 외면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성주는 자신은 부정하는 것보다 실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반박한다.

성주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흔들리는 중이다.

어떤 밤에는 과거에 두 사람이 합친 서재 안으로

죽은 해원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낀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야."

 

 

 

자살 사별자들이 겪는 애도의 과정들을

여러 시차 속에서 섣부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낸다.

극 전반을 풀어나가는 작가의 언어적 감각이 돋보인 작품이다. 

<서재 결혼시키기>의 등장인물들은 시간과 싸우는 전사들 같다.

누군가는 1년 전부터, 누군가는 훨씬 더 전부터 고장 난 시계를 들고,

자비 없이 제 갈 길 가는 시간에 맞서고 있다.

이곳은 과거의 부산물이 쌓여 있는 서재다.

여기에 누군가는 잃었던 몸을 되찾는다.

연극에서 유령 이야기가 주는 매력은

유령이 완전히 살아있는 몸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현실은 순리를 거스를 수 없지만,

연극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가 된다.

그것이 연극 속 인물에게도,

죽음이 흔해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 - 이경헌

<서재 결혼시키기>는 자살자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살 사별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희곡은 자살자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를 찾아가는데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추론에 불과하다는 말을 전하려는 의도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타인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재생산된 타인의 이미지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수용된 이미지는 자신을 닮았습니다. 그런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채우는 공허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서재 결혼시키기>는 이러한 과정을 경험하는 인물의 내면을 조명합니다. 자살사별자가 자살자를 기억하는 방식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이 희곡에는 지루함, 동어반복, 병렬적 나열, 긴 분량이라는 불편한 요소가 존재합니다. 자살 사별자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편집된 형태로 다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수업 시간에 다양한 것을 배운 게 기억납니다. 기술시간에는 인두기로 납땜을 하면서 전기를 연결시키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수학시간에는 불규칙한 도형의 넓이를 계산하는 구분 구적법의 원리를 배웠습니다. 역사시간에는 삼국시대의 고분 양식의 차이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시간에도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어떤 시간을 통과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재 결혼시키기>는 좁은 보폭으로 애도의 과정을 따라갑니다. 이 동행이 상실을 경험한 사람에게 마음의 공간을 나눠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경헌

 

2023 <래빗 헌팅>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전문사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