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희정 '옷장에 구더기'

clint 2024. 2. 1. 15:32

 

 

더기는 처음 본 남자를 집에 데려온다.

술에 취해 잠든 그를 보며 사랑을 기대한다.

아빠는 어림없는 소리라 하지만

더기는 기어이 그와 하루를 보낸다.

남자는 제 아이를 죽이고 사라졌다는 여자를 찾고 있었다.

악몽을 견디다 못해 더기를 찾았던 남자는

꽉 끌어안아 위로하는 더기의 품이 더 숨 막혀 달아나 버리고.

외로움에 미친 더기는 그를 망치고 싶은데,

이미 존재할 수 없는 아빠가 소용없는 일이라며 말린다.

 

 

 

사랑에 서툰 인간들의 모습을 은유적 세계 안에 담아낸 작품이다.

좁은 방에 옷장 하나만으로 간결하고도 묘한 세계를 만들었다.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의 원형적 관계가 은유적이며

절제된 텍스트와 한정된 공간을 활용하는 희곡의 연극성이 돋보였고,

의도된 여백들 역시도 인상 깊다.

너무 사랑해서, 너무 외로워서,

죽이고 싶고, 죽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작가의 말 - 정희정

세상에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 제대로 우는 법에도, 안기는 법에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함부로 울 수 없지만 아직 안길품이 필요한, 키만 커 버린 사람들과 그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기대하고 실망하고, 때론 사랑하면서도 외로움을 느낄까요. 왜 우린 두 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안아주고 안기려 할까요. 온전히 끌어안고 안기는 일. 그건 처음부터 누군가가 해 줄 수 없는 혼자이기에, 혼자만이 가능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저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더기를 통해 우리가 말을 나누지 않고도 품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정희정

2023 <착해 빠져선>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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