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조원석 '술래잡기'

clint 2023. 9. 22. 21:22

 

 

무대는 변두리 달동네의 어느 하숙집. 여기에는 단 한번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정치적 변동으로 6개월간의 의원생활에 그친 후 줄곧 6번이나 낙선한 전직의원, 변두리동네 스탠드바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펴다가 수배자가 된 대학생, 근대화 역군으로 자처하다 부실공사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복역까지 한 전직 건설회사원, 분단의 깊은 상처로 남편과 결별한 주인 할머니, 진실만을 주장하다 무능사원으로 낙인찍힌 종합상사 만년계장 등이 모여 산다.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이들이지만 그래도 꿈이 있다. 언젠가 국회의원이 돼 국민을 위해 바른 경륜을 펴 보이겠다는 꿈, 중앙무대에 진출해 일류가수가 되겠다는 꿈, 노동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이상을 실현시키겠다는 꿈들이 그들의 초라한 일상을 버티게 해준다. 그런 이 집에 한 장의 삐라가 날아들면서 하숙생간의 이해와 사랑이 깨어져 간다.
「간첩신고 3천만 원, 좌경용공분자 1천만 원‥‥」. 1천만 원이 있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은 막연한 기대 속에 이들의 보이지 않는 술래잡기가 시작되고 끝 간 데 모르는 불신과 암투 속에 결국 하나 둘 하숙집을 떠나간다는 내용이다. 사회에서 소외당했거나 응어리진 사람들을 통해 이 시대의 정치·사회현실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88서울국제연극제에서 공연된 바 있는 이 작품은 한 달동네 하숙집을 배경으로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성 상실의 과정을 풍자적 톤으로 그리고 있다. 6번 낙선하고도 여전히 국회의 원 출마를 노리는 전직 의원, 스타를 꿈꾸는 술집의 무명가수, 부실공사의 책임을 떠맡고 해고당한 전직 건설 감독, 위장취업 대학생, 인공시절 남편에게 배신당해 고향을 떠난 주인 할머니 등이 주요인물이다. 또 전직 의원의 하숙비를 대는 친구 경식은 회장의 수입 승용차를 인수하러 갔다가 하역 작업 중 차의 앞문이 찌그러진 사고 때문에 만년 대리로 머물러 있는 인물이다. 이들 주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 부족이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 근대화 과정에서 약삭빠르지 못하기 때문에 밀려난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을 그들의 처지만큼이나 허름한 하숙집에 모아 놓고 다양한 직업과 꿈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좌절과 아픔을 통해 '중단 없는 전진'이란 구호로 숨 가쁘게만 달려왔던, '비단 보에 싸인 개똥'으로 풍자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사회 소외계층의 전형을 이루는 동시에, 물신숭배 적 성공신화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음영을 드리우며, 또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인간성 경시와 믿음의 붕괴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인물들이 펼치는 삽화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집약적인 사건들이 밀도 있게 구축되어 있진 않지만, 이 극의 중심 모티브는 전 건설감독 창갑의 실직과 달동네에 뿌려진 현상금 붙은 전단이다. 좌경용공사범이나 위장취업자의 고발에 걸린 현상금은 이들 하숙생들에게 꿈을 펼칠 수 있는 돈이다. 그들은 "벽보가 많고 삐라가 많고 현상금이 많다는 건 사회가 병들었다는 증거”라고 적절히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보릿고개는 몰아냈지만 서로 믿고 사는 따뜻한 사회,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사회 대신 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남을 짓밟고 경쟁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긴 이런 벽보니 현상금이니 하는 것을 보면 꼭 우리가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내가 나도 모르게 쫓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각종 현상금을 걸어 사람을 고발하게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못 믿게 하는 제도적 장치, 도덕이나 가치관을 돈의 양으로 보상하고 척도로 삼는 물신주의적 사회의 변질이 비판되고 있다. "믿고 사는 사회가 되어야지. 도덕을 법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도덕이 법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데, 점점 술래잡기처럼 타인을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 현실이 날카롭게 풍자된다. 이러한 술래잡기는 결국 단란했던 하숙집 사람들의 공동체까지도 붕괴시키고 만다. 이 극은 외형적 발전만을 추구해 온 과정에서 좌절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희극적으로 그리면서 그 결과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만 인간성과 신뢰를 날카롭게 지적해낸다. 재치 있는 대사의 묘미와 성숙한 사회인식으로 뒷받침된 풍자가 극의 발랄함을 보장하지만, 인물들과의 관계와 극적 사건이 힘 있게 결집되지 못하고 병렬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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