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경희 '부럼 - 소리 극'

clint 2023. 9. 20. 19:48

 

주인공인 어머니 ‘정님’은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평생을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72세인 정님은 30대 중반에 주색잡기에 골몰했던 남편과 사별 후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아 키우느라 모진 풍상을 다 겪는다. 언제나 자식을 위해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위하여’ 살아왔다. 대학 나온 두 아들은 번듯하게 잘 사는데 막내딸 영애는 정님의 기구한 팔자를 그대로 닮아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 진수와 어머니 정님과 함께 같이 살고 있다. 
두 아들의 가족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느라 잘 찾아오지 않는다. 큰아들네는 얼마 후 캐나다로 이민가고, 둘째아들은 곧 유럽 주재원으로 나간다고 한다. 그러자 정님은 아들네에게 “매주 토요일 자신을 보러 오면 용돈을 주겠다”는 파격 제안을 한다. 정님의 말에 미안해진 두 아들은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만이라도 매주 정님에게 오기로 한다. 정님이 아낌없이 용돈을 주기 시작하자, 3남매는 어머니 돈의 출처가 슬슬 궁금해진다. ‘어머니’라는 말은 절약과 동일어였다. 홀로 자식을 키우느라 한 푼을 아껴가며 살았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펑펑 돈을 쓰자, ‘혹시 로또에 당첨된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고, 급기야 ‘로또에 당첨된 게 분명하다’는 확신으로 바뀐다. 자식들은 돈다발이 나오길 기대하며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보기도 하고, 정님에게 슬쩍슬쩍 물어보지만 대답을 하지 않아, 돈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정님의 행동거지가 이상해진다. 짧은 시일에 기억을 잃는 급성 진행 치매였다. 두 아들은 정님의 기억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자 정님의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돈의 행방을 알고 싶어 안달한다. 급기야 돈을 찾아 자신들의 몫을 챙기고 싶어하는 아들과 영애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다. 서로의 앙금을 풀지 못하고, 두 아들은 출국하고 만다. 
간병인의 도움 없인 꼼짝도 못하게 된 정님은 직장에 다니는 영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며 치매노인이 함께 생활하는 치매그룹 홈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하지만, 영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최선을 다해 정님을 돌보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배변처리가 안 되고 가출하는 일까지 터져버리자, 영애는 눈물을 머금고 정님이 원했던 곳으로 보내기로 한다. 그런데 그룹 홈의 원장에게서 영애는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정님이 그동안 그룹 홈에 기부를 많이 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남은 생을 편안하게 함께할 가족으로 이미 등록이 되어있다는 것.  
정님이 그룹 홈에 입소하고 얼떨떨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영애는 텅 빈 정님의 방을 아들 진수와 함께 청소하다 뜻하 않은 장소에서 정님이 숨겨 놓았던 돈다발을 발견한다. 정신을 놓을 때까지 자식과 손자들에게 마르지 않은 샘처럼 사랑을 퍼 준 어머니의 마음자리를 읽지 못한 자신이 미워진 영애는 다리를 뻗어 통곡을 한다. 동네 창피하다며 그렇게 하지 말라던 폐지를 주워 팔아 모은 돈과 자식들에게 용돈으로 받아둔 돈이 서툰 글씨로 쓴 띠지에 묶여 모처에 감춰져 있었. ‘큰 애들네, 둘째아덜네, 망내 꺼….’

 

 

작가의 글 - 박경희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대한민국. 오늘의 장 노년층은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번째 세대라는 우스갯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여행지에 노부모를 버리고 오는 현대판 고려장이 간혹 방송을 타고, '자식 얼굴을 돈 주고 봐야 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씁쓸해 한다.

「부럼-소리극」은 소년 과부가 되어 세 남매를 키운 70대 정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을 보러오는 자식 손주들에게는 용돈을 두둑이 주겠다고 선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평생 자린고비처럼 절약하며 살던 정님이 통 크게 내놓는 목돈의 출처와 행방이 궁금해진 자식들과 정님 간의 숨 막히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뜻밖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우리들의 민낯 자화상을 통해, 진정한 부모 공경과 효도는 자주 만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것임을 그려보고자 한다. 또한, 주인공 정님의 생일을 정월 대보름으로 설정해, 점점 잊혀져 가는 정월 대보름 세시 풍속을 우리 민요와 창작곡이 들어있는 소리극으로 형상화 하여, 남녀노소 관객들에게 즐거 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전통풍속이 흥겹고 재미난 요즘의 놀이로 재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극에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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