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해성 '살'

clint 2023. 9. 27. 16:20

 

 

무대가 밝아지면 외환거래시장 현장사무소 직원들의 모습과 장치전체에 투사된 전광판의 환율변동 숫자영상과 자판이 보이고, 시시각각 바뀌는 변동숫자를 담당자가 큰 소리로 외치며, 환율변동에 따른 대응과 정보를 주고받는 거래소의 일상이 전개된다. 크고 비만한 체구의 주인공이 능숙한 태도로 환율 변동 상황을 점검하고, 재빠른 판단과 상황변화에 대처해 가는 모습에서 외환거래부문의 앞장선 전문가로서의 입장과 면모를 파악하게 된다. 장이 끝나고 식사시간이 되면, 직원들의 음식물 섭취와 주인공의 거식증(巨食症)이 고도비만의 원인임을 알게 되고, 주인공의 처자는 해외로 나가있어 기러기 아빠로서의 처지임도 알게 된다. 사원들은 주인공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고, 사원 중 미모의 여사원은 주인공과의 대화에서 연인관계임도 밝혀진다. 고도비만이 간 기능을 저하 내지 악화시키고, 주인공의 모친이 간경화로 간이식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에다가 누이동생마저 간질환자라, 주인공은 친구인 의사의 권고대로, 음주와 흡연을 삼가고, 운동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한편 경찰에서는 환율 변동치를 특정인에게 발설해, 정보수령자가 거대한 이득을 보도록 만드는 정보 제공 혐의자, 통칭<프로메테우스>로 주인공을 지목하고, 감시를 한다.<프로메테우스>는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불씨를 인간에게 제공한 죄로 주신<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코카서스 산의 절벽에 묶인 채,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고, 밤에는 간이 되살아나고, 낮에 다시 쪼아 먹히는, 고통과 재생이 반복되는 고난을 겪는 인물이다.<프로메테우스>의 정의관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에 옮기고 관철시키는 선구자적 정의관을 가졌기에,<제우스>의 불의에 반항해, 불씨를 인간에게 전했다는 신화 속 등장인물인데, 외환거래정보제공자를 <프로메테우스>로 부르는 관행이 있어, 주인공의 정보제공으로<헤르메스>라는 별호의 특정인과 그 회사에 막대한 이득을 보도록 만든 혐의를, 경찰에서 주인공인 가장 뛰어난 외환정보담당자에게 씌운 것이다. 주인공은 애인인 여직원에게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설명하고, 동침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간이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주인공의 모친은 사망하게 되고, 주인공은 구속된다. 얼마 후 무혐의로 석방이 된 주인공이 회사로 돌아오니,<프로메테우스>라는 정보제공자에 의해 큰 이득을 보고 거부가 된<헤르메스>사에서, 주인공에게 특채섭외가 들어온 사실을 알게 되고, 다니던 회사는 파산상태에 이르렀고, 부채까지 엄청난 액수라는 것을 알게 되고, 주인공이 회사를 옮길 시에는 그 부채를 청산하고 떠나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대단원에서<프로메테우스>가 바로 애인이자 직장동료인 여성임이 밝혀지자 주인공은 배신감과 충격으로<헤르메스>로의 이적을 거부하고, 애인대신 창녀와 동침을 하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자신의 그간의 행동과 고도비만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살에 날카로운 기구로 자해를 가함으로써, 피투성이로 비명을 지르면서 식탁위에 촛불을 끔으로써 연극을 마무리한다.

 

 

 

 

신화(神話)와 금융자본주의 시대 현실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믹싱한 탄탄한 구조의 대본. 배우들을 압도하는 듯하지만 극의 개념과 핵심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살려낸 무대. 왜소한 듯 보이면서도 무대에서 빛을 발하는 배우들의 연기. 극의 흐름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드러내며 연기를 보강하는 춤과 음악, 그리고 영상. 게다가 일확천금을 노리는 인간의 욕망, 스릴, 섹스, 미스터리 등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를 두루 갖추면서도 뚜렷이 부각되는 사회비판, 문명비판의 메시지와 휴머니즘이 들어있는 작품이다. 중년 남성의,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몸뚱어리가 고스란히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숨기고픈 현대 사회의 속살이 적나라하고 거침없이 까발려진다. 작가의도를 빌리면 “실물경제를 대체한 금융 자본주의를 고발”하며 “승자독식의 냉혹한 생존게임이 만연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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