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철 '황혼의 시'

clint 2023. 9. 28. 18:10



한 남자가 노인을 이끌고 아파트로 들어선다.
노인의 이름은 이배만, 그는 자신의 몸보다 조금 커 보이는 재킷을 입고 있다. 

오래 전엔 그 옷이 몸에 딱 들어맞았을 것이다. 

바지 또한 마찬가지. 무릎이 나와 있다. 모자를 쓰고 있는데 

거기엔 전쟁의 경험을 애써 내세우듯 여러 표식들이 달려있다. 

가로질러 멘 가방에도. 그리고 태극 문양 타이 슬링. 

그러나 이배만이 군인으로 참전했는지는 분명치않다.
남자의 이름은 박용식. 그가 노인을 이끌고 온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노인에 게 보이는 친절은 진실해 보인다. 
고급스러운 정장 보다 더욱 눈에 띄는 건 커프스버튼. 그는 사업가임이 틀림없다.
노인은 낡은 소파만 놓인 거실에서 홀로 하룻밤을 보내고 떠나려 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를 보내려 하지 않는다.


연극 <황혼의 시>는 "당신의 외로움과 위태로움을 삽니다"라는 테마 아래 
노인 '이배만'과 사업가 '박용식'을 중심으로 노인의 위태로운 자존감과 부조리한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노인 이배만은 중년의 사업가 박용식의 끈질긴 권유에 철거 직전의 허름한 아파트로 들어온다. 
남자는 '국가를 세우는 데 공이 있었다'며 노인을 정중하게 대하고, 
노인은 사업가의 과한 칠절에 자리를 뜨지 못한다.
결국 남자의 간청에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노인. 
노인과 남자가 아파트에 머무는 동안, 기자 '최병진'이 

젊은 남자 '정지석'이 찾아온다. 
노인은 최병진, 정지석과의 대화를 통해 국가유공자로서 지켜오던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사업가인 남자는 상처 입은 노인의 자존심을 치켜세우며 

'국가의 건설과 이념에 봉사할' 사업을 함께 하자고 하는데.
지나친 호의와 무너져가는 아파트, 누가 봐도 의심할 만한 상황이지만, 
노인은 냉정해지지 못한다. '애국'이라는 명목 아래 지켜지는 노인의 자존심은 무엇인가? 
노인의 위태로운 자존감은 다른 사람이 노인을 이용하도록 만드는 명분이 되고, 
국가유공자는 내실 없는 허울에 불과하다. 

 



<황혼의 시>는 압축적인 이야기 전개로 급변한 현대 사회를 살아낸 노인의 삶을 그린다. 
작품은 친절하고 신사적인 태도로 노인을 대하는 사업가, 
더불어 언론의 힘을 이용하는 사회의 모습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노인의 외로움과 위태로운 자존감은 다른 누군가의 장황한 대의명분에 이용된다. 
노인은 그 안에서 생존하는 것만이 미덕인, 

이미 그 자체로 부조리한 사회에서 누구든 맞닥뜨리게 될 황혼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의 글 - 이철
경희대 졸업
2010 전남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유산〉



썩은 말들이 많습니다.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지난 말들입니다. 
분명 내가 만든 말은 아닌데 듣다보니 내 것 같아진 말들입니다. 
어느 순간 짓무른 그 말들은 내 자존감을 만드는 데에 동원됩니다. 
내 세상 을 온전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데에 사용됩니다. 
그래서 나도, 세상도 완벽해집니다. 
갈 데 없는 사람들의 집들이 헐리고, 제 목숨 끊는 사람들이 하루 수십명이고, 
밥줄은 항상 위태로워도 나는, 세상은 완벽합니다. 
일용잡급직 밖에 안 되는데도 그렇습니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우재 '이 형사님 수사법'  (2) 2023.10.01
추민주 '뮤지컬 안녕'  (1) 2023.09.29
이해성 '살'  (1) 2023.09.27
김재엽 '서바이벌 캘린더'  (1) 2023.09.25
조원석 '술래잡기'  (2) 2023.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