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은 김연재 작가의 섬세한 언어와 매혹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은 노르웨이에서 인공부화 된 흰머리쇠기러기가 흑산도에 도착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르웨이의 철새연구원이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그와 생일이 같은 사람들은 동시에 이명을 듣는다. 무민이 잘못 건 전화는 서울의 산불감시원이 받는다. 그의 딸은 노르웨이어과 조교수이다. 철새연구원은 노르웨이에서 온 흰머리쇠기러기에 부착되어 있던 가락지를 잃어버렸고, 조교수는 어릴 때 엄마와 남동생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어느 날 밤, 하수구공은 화장실 바닥에서 목격한 흰머리쇠기러기를 따라 하수구를 파내려 간다. 연결된 하수구를 따라 노르웨이 베르겐대학, 서울의 한국외대, 흑산도의 철새연구소, 도넛 가게와 산불 감시소 등 파편처럼 흩어진 인물들이 서로 만나게 된다.
핏줄처럼 연결된 하수구 곳곳에 연극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세워 둔다. 꼬인 하수구 구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타인의 삶들이 드러난다. 저기에 사람이 있었나 싶다. 하수구 속으로 들어갈수록 외따로 존재했다고 믿었던 삶들이 사실은 나와 같은 하수구 속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저들의 삶을 수혈받고, 저들은 나의 경험을 몸에 새긴다. 교묘하게 연결된 하수구처럼 우리의 삶도 기묘하게 엮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반갑지만 불쾌하고, 행복하지만 음울하다. 캐셔가 분투해서 만든 헬멧과 그 헬멧의 용도를 설명하는 이완호. 캐셔의 도움을 받았던 교수와 하수구공의 만남. 아들의 장난 전화로 우연히 알게 된 산불감시원과 문화관광해설사 등 김연재 극작가는 삶과 삶의 실타래를 정성껏 연결하고, 때론 가차 없이 비비고 엇감는다. 결국 풀 수 없게 얽히고설킨 우리의 세계, 우리의 하수구가 극 막판에 모습을 드러낸다.
철새의 탄생과 철새 연구원의 죽음을 통해 무관해 보이는 인물이 서서히 연결되는 과정은 신체행동연기로 표현한다. 행동의 나열을 통해 인물과 장면을 전달하는 신체행동연기로 배우들은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마법같이 구불구불한 하수구 세계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작품은 ‘나는 왜 나이며, 나는 왜 저곳이 아닌 이곳에 있는가’ 등 자기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난해한 제목은 하이네의 시에서 따온 거란다,
"오 나에게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주시오.
오래된 짖궂은 수수께끼를
이 문제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짰소.
상형문자무늬의 모자를 쓴 머리들
터반을 두른 머리들과 검은 성직자모를 쓴 머리들
가발을 쓴 머리와 수천의 다른
가난하고 땀흘리는 인간의 머리들
말해주시오,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지?
인간은 어디서 오는 것이오? 인간은 어디로 가는 것이오?
저기 황금의 별들에는 누가 사는 것이오?"
-하인리히 하이네, <<노래의 책>>(1827), <물음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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