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드물게 신(神)과 종교의 문제를 진지하게 천착한 작품이다.
이문열은 이 작품으로 제3회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하면서 1980년대 가장 주목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구성상의 몇몇 문제를 고친 개정판이 1987년에 출간되었다.
한 형사의 집요한 추적을 통해 단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살인사건의 내막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적 기법이 확인되며, 그러한 과정에서 주인공 민요섭의 노트를 통해 제시되는 ‘아하스 페르츠’에 관한 이야기는 액자형식의 내화(內話)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하스 페르츠에 관한 이야기가 단속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원적 구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선과 정의로 표상되는 천상의 논리와 지혜와 자유로 특징 지워지는 지상의 논리 사이의 충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천당과 영원을 약속하는 기성 종교의 비현실성에 대하여 사람의 아들들에게 절실한 삶의 복락, 현세적 위무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것, 즉 신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종교적 진리의 실현보다는 사회적 정의의 실현에 더욱 치중하는 것이 「사람의 아들」의 기본 방향이다. 이 점은 구원보다는 정의를, 신의 논리보다는 인간의 논리를 계속 추구하는 민요섭의 지향이, 신의 은총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에 놓여 있음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람의 아들」이 암울했던 1970년대 상황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제기의 한 양식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아하스 페르츠라는 아이는 영광의 별로 예비된 예수가 태어난 비슷한 시기에 어둠의 별빛을 받으며 태어난다. 그는 영리했다. 유대의 모든 신령한 경전을 암송했다. 그의 지혜는 해가 거듭될수록 자랐다. 그러다 테도스라는 자칭 메시아를 만나서 삶의 어두운 이면을 목격하고 아삽이라는 부자의 젊은 여인을 만나 사랑에 눈을 뜬다. 그러면서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던 유대종교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아버지와 심한 논쟁 끝에 참된 신을 찾기 위해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다른 신을 찾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유일신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제일 먼저 이집트로 가서 이시스교의 사제를 찾아간다. 이시스교는 부성신인 유대교와는 달리 모성신이었다. 그러나 사제의 고백은 그에게 충격을 준다. 일반 백성들은 신에 의해 스스로 속기를 원한다는 고백이었다. 그가 알고자 했던 것이 고작 '믿기 위한 미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바로 그곳을 떠난다. 다음에 찾은 것은 농경신인 바알신이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는 실망을 할 뿐이었다. 이제 그는 헤테인인 무와탈리슈를 만난다. 무와탈리슈는 왕족의 후예로 그들 조상의 잃어버린 신을 찾으려 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다음에 바벨론의 마두루크신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는 우연한 기회를 맞이하여서 바벨론의 옛 영광을 살리려는 히메루스에 의해서 왕이 된다. 그러나 그 왕은 대리왕으로 희생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히메루스의 양녀이자 그의 아내가 그런 음모를 알려주어서 그는 탈출을 하게 되고 후에 아내의 처참한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아하스 페르츠는 이원론인 조로아스터교에 몰두한다. 이는 선신과 악신이 공존하는 종교였다. 후에 인도를 거쳐 로마로 들어가서 희랍철학과도 만나게 된다. 이 모든 여정은 신을 찾는 과정이었지만 어느 하나 그의 갈증을 풀어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해를 평생 연구하다가 눈을 잃은 노인을 만나고 번민하다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고향의 광야, 쿠아란타리아에서 위대한 영과 만난다. 그 존재는 우주에 대한 진리의 설명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와 그 광야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는 예수에게 세 가지 질문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사고에 대해서 그의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사탄으로 규정하고 물리친다. 그 후에 그와 예수는 몇 번의 사건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가 가진 사상, 혹은 믿음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고자 했다.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 이에게 보이지 않는 천국이 허구 이상의 개념을 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모든 것을 정신적인 곳에서만 추구하려는 신의 아들인 예수를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둘의 이상은 결국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명제에 집중이 된다.
어느 한쪽을 정신적이나 물질적이라고 단정하기엔 많은 난점들이 있지만 정신과 물질이 대표할 수 있는 은유의 상징을 부각시켜서 보자면 확연히 다른 길을 통해서 그들은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선신과 악신의 모순적인 분리에서 이미 잉태된 갈등은 거대한 두 개의 세계의 화해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쿠아란타리아 서에서 나오는 선신과 악신의 본래적인 합일, 즉 하나의 존재였다는 선언은 두 세계가 각각 추구하는 방법의 모순을 해결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서로의 인정과 상호협력이라는 현실적 방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조동팔에서 개명한 김동욱은 '민요섭'이 끝내지 못한 새로운 신의 개념을 완성 시켰다. 그것은 선악의 구도를 뛰어넘어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성에 인간들 스스로의 행위를 보장받고자 하는, 즉 신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수의 죄과를 벗어나는 신이었다. 그러나 '민'은 거기에 도착해서 자신의 오류를 시인했다. '민'은 선악에 대해서 칭찬과 꾸짖음을 주는 신을 다시 원했다. 힘든 노력의 마지막에 도달한 것이 기껏 이성적 신이었다는 사실이 싫었던 것이며 구원의 신비를 하늘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던 것이다. 결국 김동욱은 자신의 신을 지켜내기 위해서 '민'을 살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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