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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clint 2022. 12. 9. 19:49

 

 

밀라노의 손꼽히는 고서적 전문가 잠바티스타 보도니(일명 얌보) 1991 4월 심장혈관 계통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역행성 기억 상실증이라는 후유증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증상은 아주 특별하다. 공적인 기억, 백과사전적인 기억은 온전한데,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억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의사가 이름을 물으면, 그는 자기 이름을 말하는 대신 이름과 관련된 세계 문학의 유명한 문장들을 떠올린다. 입을 열었다 하면 어디선가 읽은 문장들이 튀어나오고, 글을 쓸라치면 인용문들의 모자이크를 만들기가 십상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관한 정보는 훤히 꿰고 있으면서도 외손자 알레산드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30년 넘게 결혼 생활을 해온 아내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으로 지내 온 친구도 완전한 타인이다. 그는 심리학자인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기억의 동굴에는 안개만이 자욱하다.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과 가족사를 재구성해보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는 없다. 자기가 안개를 좋아하고 안개에 관한 글들을 많이 모아 놓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지만, 그 이유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본다거나 벼룩시장에서 어린 시절에 읽었던 만화책과 맞닥뜨린다거나 하는 경우에 가슴속에서 <신비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뿐이다. 주인공 얌보는 이런 불꽃들이 기억의 안개 속을 비춰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아내의 권유에 따라 자기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솔라라의 시골집으로 간다. 솔라라는 얌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의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도시의 공습을 피해 이 시골 마을에서 2년 동안 살기도 했다. 이곳에는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아주 커다란 시골집이 있다. 헌책방을 운영하셨던 할아버지의 온갖 수집품들과 얌보의 소년 시절 물건들이 고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이 시골집에서, 특히 옛날의 책들이 잔뜩 쌓여 있는 다락방에서 사적인 기억을 복원하기 위한 얌보의 경이로운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장난감, 판화, 만화, 동화, 통속 모험소설, 고전소설, 대중가요, 교과서, 파시스트들의 정치 선전 등 온갖 것들을 망라하여 현대 이탈리아의 가장 파란만장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다시 그려 나가는 흥미진진한 여행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복원된 과거는 <종이로 된 기억>일 뿐 가슴으로 느끼는 생생한 추억이 아니다. 신비한 불꽃들이 가슴속에서 숱하게 일렁거리고, <곰돌이 안젤로>, <벼랑골>, <피페토> 같은 말들이 수수께끼처럼 뇌리를 스쳐 가지만, 얌보의 기억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자기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어떤 사건들이 있었다는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 한 여학생을 열렬하게 짝사랑했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확인되기는 했지만,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들은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다. 솔라라에서는 더 찾아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곳을 떠나던 날, 얌보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물건들이 감춰져 있던 <지성소>를 마지막으로 둘러보다가 놀라운 보물을 발견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로써 코마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기이한 상태에서, 진정한 <노스토이(귀향)>, 진정한 오디세이아가 시작된다. 앞에서 제시되었던 모든 수수께끼가 하나씩 풀려 나가고, 작가가 꼭꼭 감춰 두었던 빨치산 이야기와 첫사랑 이야기가 진한 감동과 긴 여운을 남기며 펼쳐진다.

 

 

<삽화 소설>이라는 이색적인 장르 명을 달고 있는 이 작품은 단순히 글로 쓰인 것들을 그림으로 따라가는 <삽화가 들어 있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삽화와 소설이 결합된 형태라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직접 제작한 몽타주를 비롯하여 1940~1950년대 이탈리아를 생생하게 되살리게 해주는 다양한 이미지 자료들이 텍스트들과 병치되어 독특한 효과를 빚어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미지들의 상당수가 에코 개인의 추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실제로 많은 자료들이 작가의 개인 소장품이라는 점이다.

에코는 라 레푸블리카에 실린 기사(2004 6 10일자, 44)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 아니고 그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여러 에세이를 통해 밝힌 전기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주인공 얌보의 모델은 작가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 밀라노의 셈피오네 공원이 건너다보이는 아파트, 어마어마한 장서(밀라노 아파트에 5천 권, 시골 별장에 3만 권), <히프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라는 책에 대한 애정, 헌책방에서 구했다는 파피니의 고그 초판본, 파쇼 시대의 작문, 곰돌이 안젤로의 추억, 아이스크림에 얽힌 추억, 1943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피난 시절 이야기, 알레산드리아의 안개(얌보는 그냥 <도시>라고만 하면서 도시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책에 실린 보르살리오 모자의 광고 포스터에 알레산드리아가 나와 있다), 알레산드리아의 기차역 신문 판매대에서 구한 소설 등 많은 요소가 에코의 전기적 사실과 일치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무대인 솔라라는 에코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니차 몬페라토와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네르발에게 발루아가 있고 프루스트에게 콩브레가 있다면, 에코에게는 솔라라가 있다. 일리에가 콩브레의 모델이었듯이, 니차 몬페라토는 솔라라의 모델이고, 얌보와 벨보(푸코의 진자의 주인공 벨보와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얌보는 어린 시절을 공유한다. 얌보가 솔라라 피난 시절에 겪은 이야기는 푸코의 진자에 나오는 벨보의 추억 -- 15, 16, 49, 54, 55, 56, 64, 96, 118, 119 -- 을 연상시킨다)가 그렇듯이 에코의 모든 추억은 이 솔라라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에코의 다섯 번째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시대의 멘토>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일견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타이틀을 모두 획득한 전대미문의 작가 에코에게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세상에 대한 모든 백과사전적 기록들을 다 기억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그 상실된 기억의 조각들을 복원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 역시 에코 특유의 가공할 지적·문학적 파노라마를 특징으로 하지만, 그 공적인 기억에 스며든 개인의 역사, 인류가 만들어 낸 모든 아름다운 텍스트들 너머에서 빛을 내는 가슴속 깊은 사랑은 독자들로 하여금 에코라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과 대면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면의 순간 독자들은 이전의 소설들에서 느꼈던 재미와 감동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의 영어판 번역자 제프리 브룩이 말했듯 이 소설은 무엇보다 시대의 지성 에코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