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빗소리가 들리고 전화벨이 울린다. 그리곤 전화 통화 내용이 들려온다. 자다가 일어나서 전화를 받는 이만국. 서로 보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한창인데 조카 해문이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고 전화를 했다. 간암이라고 했나? 아무튼, 간 이식수술을 해야 하는가 본데 다른 사람들의 피는 맞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만국은 다시 고향 조치원 땅을 밟기로 한다. 극 초반에 어둠 속에서 말소리만 들렸다가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확하게 이 장면이 다시 한번 나온다.
이만국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탄다. 기차의 창문 밖으로는 앙상한 나무가 한그루 보인다. 나무 밑에는 낙엽. 기차의 후미 쪽에는 작은 스크린이 있다. 가끔씩 여기에 40년 전, 10년 뒤, 얼마 후.. 등등의 시간을 알려주는 문구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만국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난다. 그의 직업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경계를 허문다. 흠... 시인이라는 직업이 주는 멜랑꼴리함과 아스트랄함이 있지. 대상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속성을 발견해 내는 시인과 이만국은 짧은 만남에서 인생의 깊이가 담긴 대화를 나누는데... 그 시인은 기형도. 이만국이 탄 기차는 기형도 시인이 사망하기 전인 1989년 이전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시간들.
기차는 점점 조치원을 향해 가고 만국의 고민은 깊어진다.
그의 독백처럼 이 형제는 원수지간이다. 아버지가 죽고 만국이 입대한 사이에 형 성국이 만국의 여자친구를 빼앗아 결혼했고, 제대한 다음엔 복숭아밭 한 평 안 떼어주고 빈털터리로 내쫓았다. 성국은 “썩은 복숭아는 골라내야 해. 안 그럼 성한 것까정 썩어. 넌 그 부아를 도려내야 해”라고 빈정거린다. 죽어가는 형에게 복수할 것인지, 간 한쪽을 떼어주고 살릴 것인지를 말이다. 만국은 “가서 내 간 떼어주고 성 살릴라네. 그런 다음에 내 손으로 끝낼 거여”라고 말한다. 손에는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가 있다.
열차 곧 조치원, 조치원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차창 밖에는 어둠 속에 생선가시처럼 겨울나무들이 새하얗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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