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철희 '외경'

clint 2022. 10. 4. 21:29

 

 

<외경>은 창세기,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의 이야기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뱀이 남자에게 찾아온다. 남자는 뱀을 자신 안에 숨겨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뱀은 남자의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남자는 두루미에게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도움을 구한다. 두루미는 뱀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묘안을 알려준다하지만 고마움은 커녕 남자는 이 친절한 두루미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 이야기는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을 떠나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상상까지 해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창세기와 우리의 상상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평면적이고 단순하다. 이 단조로운 이야기를 이철희 작가는 가위로 가차 없이 자른다. 그리고 그 크고 작은 조각들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덧붙인다. 그 결과물이 바로 연극 '외경'이다.

무대가 시작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 보인다.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고통, 슬픔, 부끄러움 등을 느끼게 된 아담과 이브는 마른 땅에 마른 씨앗을 고생스럽게 심으며 살고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연극 '외경'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세포분열을 시작한다. 캐릭터, 주제, ·식물, 성별을 무한대 확장하고 전복시키며 경계를 넘나든다. 정확히 말하면 연극 속엔 경계가 없다. 연극은 무질서하고 무분별하다. 아주 멋지게. 아담이 뱀인지, 뱀이 아담인지, 이브가 아담인지, 아담이 이브인지, 두루미는 조력자인지, 아니면 복수의 대상인지 등 어떤 관계와 개념에 대해 정착하길 거부하고 끊임없이 전복의 전복을 반복하던 연극 '외경''아담과 이브'의 무대가 사실은 우리 인류의 세계임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이익과 알량한 기분에 따라 관계가 수없이 전복되고, 숭고함 마저 빛바래게 만드는 우리들의 세계 말이다.

 

 

 

작가의 글 이철희

사회를 벗어 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타인에 대해 너그러울 수 있는 [정도]가 있습니다. 그 정도를 굳이 수치로 따져보자면 종국에는 나의 [득과 실]입니다. 개인의 [득과 실]이라는 기준은 타인과 맺게 되는 [관계의 종류]를 결정 하게 되지요. 극적인 예이지만 친구로, 원수로, [실에서 득]이 된다면 원수에서 친구로, [득에서 실]이 된다면 친구에서 원수로도 변할 수도 있지요. - 사회 안에서 인간의 관계는 야속하게도 [정치적]인 것입니다. 이에 능숙할수록 세상을 지혜롭게 잘 사는 어른이 된다고 말하지요. 은유적 공간에서 벌어져 버린 직설과 우화가 난장 된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거울로 비추어지길 바랍니다안타깝지만요. <외경>은 기독교인으로서 제가 가졌던 질문에서 비롯된 이야기예요. 나는 항상 죄를 짓고 죄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내가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수고롭고 번거로운 일들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요. 왜 최초의 인류는 선악과를 따먹었지? 애초 그곳에 선악과를 두지 않았다면, 이런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텐데…. 신학을 공부하는 친구들한테도 이런 질문들을 해봤지만, 누구도 명쾌한 답을 주지 않더라고요. 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없는 곳이고, 어쩌면 이미 이 세상이 지옥일 수 있겠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은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고, 우리가 사랑을 배울 수 있도록 인간에게 내려진 신의 선물이 아닐까. 이렇게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을 가지고 <외경>을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