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정숙 '《숙영낭자전》을 읽다'

clint 2022. 1. 8. 07:56

 

 

 

과수댁과 섭이네는 방망이질로 빨랫감을 다듬고 있고, 어멈과 막순이는 바느질을, 마님은 향금아씨에게 인두질 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향금 아씨의 혼례가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해야할 일이 산더미인 것이다. 일하다가 방귀도 뀌고, 서로의 솜씨를 견주며 칭찬도 하고 타박도 하다가 잠시 야식을 먹는 쉬는 시간도 가지면서 일을 하고 있지만, 고되고 지친 일에 무료함을 달래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이 여인들은 몇 날 몇일을 이렇게 보냈음에 틀림 없다. 향금아씨에게 혼수로 보내기 위해 새로 지은 녹의홍상도 입혀보고 시댁에서 주의해야 할 일 등을 이야기하다가 분위기가 울적해지자 과수댁은 이제 아씨가 시집가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책을 읽어 달라고 조른다. 이에 마지못해 책을 펼치는 아씨.

향금아씨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옛날 옥연동에 백선군이라는 사람이 살았더라..' 이렇게 첫 대목을 아씨가 읽자 다섯 명의 여인들이 모두 차례로 돌아가며 아씨의 이야기를 따라 읽는다. 하지만 모두 발성법이나 목소리, 느낌이 다르다. 하나의 이야기 책을 읽고 있지만 모두 각각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는 소름돋는 장면이다. 배우들의 형형한 눈빛과 함께 조명이 잦아들고 달빛이 어른거리는 이야기 속의 무대가 된다. 조명이 바뀌면서 배경으로 선군의 그림자가 등장한다. 극중극의 시작인 것.

 

 

 

 

규방의 아녀자들이 읽고 있는 숙영낭자전의 줄거리는 이렇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선군과 숙영은 옥연동에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아이들도 낳지만 (사실혼 상태.) 선군의 숙영에 대한 애정이 너무도 깊어 공부를 게을리하자, 아버지는 선군을 과거를 보러 집을 떠나게 한다. 하지만 선군은 길을 가다가도 밤마다 몰래 집으로 돌아온다. 며느리의 방에서 낯선 남자의 그림자와 목소리를 들은 선군의 아버지는 하녀인 매월이에게 숙영을 감시하라고 이르고, 선군을 사모했던 매월은 숙영이 다른 남자와 통정을 했다고 모함한다. 이에 숙영은 결백을 위해 자살한다. 후에 과거에 급제해 돌아온 선군이 그 사실을 알고 매월을 처형하고 자신도 숙영을 따라 함께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규방의 아낙네들은 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 선군이 옥연동에서 숙영 낭자를 만나 혼인을 약속하는 대목에서 규방의 막내인 막순이는 가난하여 아무도 혼사를 청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말하며 한숨과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시집가는 향금아씨를 부러워한다. 선군이 숙영 낭자와 운우지정을 나누는 장면에서 과수댁은 워메 워매 워매~를 연발하며 아씨를 재촉하고, 마침 지나가는 옆집 남자의 헛기침 소리에 이웃집의 이불 속 사정을 흉내 낸다.

 

 

 

 

선군과 숙영낭자의 사랑 이야기에 흠뻑 빠진 여인들은 어느새 극중극의 인물들이 된다. 과수댁은 선군, 향금아씨는 숙영, 마님은 시어머니, 어멈은 시아버지, 막순이는 매월, 섭이네는 매월이 사주한 머슴..이런 식이다.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자 배우들은 각자가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어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듯 했다. 동시다발로 터지는 대사, 붉은 조명, 번들거리는 눈동자... 내내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향금아씨는 시집을 가고 싶지 않은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고, 시집을 가면 서방님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고되고 외롭다는 시집살이를 잘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숙영 낭자가 자살하는 장면이 나오자 향금아씨는 책을 읽던 작은 책상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물 속으로 뛰어든다... 규방의 여인들은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독송하기 시작한다. 천수경에 나오는 악업을 그치고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소멸하여 깨달음을 이루게 해줄 것을 원하는 주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과거에 급제해 돌아온 선군이 숙영낭자의 자살 소식을 듣고 자신도 숙영을 따라 함께 생을 마감하였기로 그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주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들의 맺힌 한을 풀기 위한 주문일 수도 있다.

어느새 책을 모두 읽었다. 여인들은 하나 둘 자신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차곡차곡 뒷정리 한 후에 잠이 든 섭이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규방을 나선다. 섭이네는 꿈속에서 옥연동의 선군을 만난다. 꿈속에서는 섭이네 자신이 숙영낭자라도 되었을까? 책을 읽으며 주인공의 자리에 스스로를 넣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해맑게 잠자면서 웃고 있는 섭이네의 모습에 애정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