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전업주부와 그의 이웃으로,
계약직과 실업상태를 오가는 젊은 여성이 가느다란 로프에 서로 의지하고 연대하며,
그들을 억누르는 현실의 시스템에 대항해 탈출을 시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건 혹은 사용가치로 대체되는 동시대의 인간관계를 비판하는 희극이다.
심사평 – 노이정 연극평론가, 문삼화 서울시극단장
"평범한 존재들의 저항 생기 있게 구축하는 솜씨 돋보여"
응모편수가 75편으로 예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공연 현장과 대학의 교육 현장이 상당부분 위축되고 있으며 희곡 장르의 창작 역시 여기에 영향을 받고 있지 않나 짐작해 본다. 올해 응모작들 속에서 고립의 문제는 어느 때보다 부각되었다. 1인 가구의 현실, 청년 실업, 고독사, 신뢰가 깨진 사회, 직장 내 경쟁관계, 가족 관계 속의 소외 등이 문제적으로 다뤄졌다. 고립 속에서 실그물처럼 형성되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희곡들도 눈에 띄었다. 당선 후보로 논의된 작품들은 '정기구독', '별똥별, 날아오르다', 'H' 세 편이었다. '정기구독'은 사물인터넷과 구독경제의 일상화 속에서 디지털 데이터로 수렴되어 가는 우리 삶의 양상을 1인 가구, 청년실업 등의 사회 문제와 결합한 작품이다. 희극적 톤을 유지하면서 극을 발전시키는 정교한 변주가 돋보였다. 인간 사이의 대화가 극도로 축소되고 기계와의 소통을 통해 일상을 영위해가는 삶의 양식적 변화를 극적 형식 안으로 들여왔으며 숫자로 치환되어 가는 존재의 위기를 보여준다. 주제의 동시대성 뿐만 아니라 안정된 대화, 유머러스한 상황 구성 능력으로 심사위원들의 큰 지지를 받았으나 지나친 반복과 인용, 극적 행동의 제약 등이 무대 표현의 걸림돌로 지적되었다.
'별똥별, 날아오르다'는 오래된 다가구 주택의 다섯 가구 인물들을 상호 교차시키는 가운데 보육원에서 성장한 청년과 독거노인의 만남을 그렸다. 고시원을 나와 자립의 새로운 단계에 선 청년과 외톨이 노인은 서서히 대화의 물꼬를 튼다. 소박한 무대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군을 구현한 것이 장점으로 꼽혔지만 극적 상황이 분절적이고 제목에서 제시하고자 한 의미가 극 전개 과정을 통해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H'는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에서까지 소외된 두 주인공이 함께 탈출을 꿈꾸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스노우볼 코미디다. 주제면의 새로움보다는 거기에 대항하는 평범한 존재들의 저항을 희극적 문법에 의지해 생기 있게 구축해나간 솜씨가 돋보였다.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전업주부, 계약직과 실업 상태를 오가는 젊은 여성은 가느다란 로프에 의지하여 서로를 잇고 연대를 발전시킨다. 작가는 물건 혹은 사용가치로 대체되는 인간관계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극작법 안으로 슬그머니 끌어들여 명랑한 희극을 만들었다. 장단점이 분명한 세 작품 중 'H'를 당선작으로 올린다. 작가의 거침없는 언어 능력과 상황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과감함이 장막 희곡 창작에도 힘이 되기를 기대한다.
당선소감 - 조은주
요새 잠을 잘 잡니다. 걱정과 불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건강 앱의 수면 그래프를 확인합니다. 걱정과 불안이 없기 때문에 그래프의 막대기는 거의 끊김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막대기가 불연속적으로 끊겨 있었습니다. 그 끊어진 잠의 토막 사이에 기억도 안 나는 심상한 꿈들이 들고 났던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별일은 아닙니다. 그런 날도 있으니까요. 아침으로 샐러드를 막 먹기 시작했을 때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마침 그때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거절과 수락 버튼을 헷갈려 거절해버렸습니다. 괜찮습니다. 가끔 그럽니다. 다시 전화하면 됩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당선을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샐러드와 따뜻하게 데운 닭고기를 먹을 때까지의 제 삶은 잠의 토막 사이에 들고 나는 꿈들처럼 심상하고, 기억도 안 날 만큼 평범했습니다. 사소한 이벤트조차 없었습니다. 기대해본 일은 잘 안 됐으며 거의 모든 일은 반전없는 결말로 스러지고, 로또는(몇 번 사보지도 않았지만) 5등도 돼 본 적이 없습니다. 애매한 예삿일. 그게 여태껏 살아온 바의 한줄평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 닭고기가 식어가면서부터는 일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음……이게 무슨 일이지? 당선 소감을 쓰는 지금도 어리둥절합니다. 그냥 저는 인생을 거진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만 읽으며 보냅니다. 어제도 좋아하는 소설가의 최근작을 읽으며, 아 이런 사람이 작가고 예술가지 나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화가 오지 않는 것에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선이 되었다 하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내가 왜? 어째서? 특별히 감사합니다. 저를 책과 사랑으로 키워주신 어머니, 신춘문예 응모를 권유하신 연출가 정범철 선생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성선희 선생님, 정다운 희곡창작수업 학우님들, 그리고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덕분에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작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로 사는 게 더 힘들다고 합니다. 꾸준히 글을 쓰며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한번의 당선보다 더 힘들다는 말이겠지요. 앞으로 어떻게 작가로 살아야 할지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제 수면 막대기가 끊기는 걸까요? 전화가 오지 않는 동안 사실 한 가지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뭐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쓰는 걸 즐기자. 즐기는 사람은 못 이긴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각오는 채 마련하지도 못했지만 즐기며 쓰겠습니다. 사실 즐겁습니다.
△1983년 인천 출생
△단국대학교 어문학부 국어국문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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