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태수 '칼맨'

clint 2018. 3. 26. 14:36

 

 

줄거리

서울 변두리. 유흥가가 밀집한 신흥 개발 지역의 외곽에 위치한 푸줏간에 가까운 정육점. 그 뒤에 딸려 있는 마당 있는 집.이곳을 배경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극이 시작되면 실향민 출신의 정육점 주인 우두철이 등장한다. 우두철은 칼에 관한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한 전문적 지식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살고 있는 집에는 어릴 적 충격으로 인해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딸 영애와 함께 절친했던 친구의 배신으로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자 친구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가슴에 칼을 품고 친구 찾아 주방용품을 팔며 전국을 유랑하는 하는 춘삼, 과거를 감추고 무엇인가를 꾀하고 있는듯한 과격한 사내 병태, 뮤지컬 배우를 꿈꾸지만 현재는 밤무대 가수로 살아가는 이 집의 또 다른 하숙생 도미가 살고 있다. 무협지를 읽으며 생활하던 병태에게 살인교습을 배우는 춘삼, 도미의 뮤지컬 연습과정을 강도가 든 것으로 오해하고 도미방에 뛰어 들어가는 병태, 밤무대를 관리하는 조직폭력배의 협박을 받는 도미를 구출해주는 두철과 병태 등 많은 일들이 이들에게 일어난다. 그 과정 중 병태는 두철이 만들었다는 신검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신검을 만들어 달라고 보채지만 두철은 거절을 한다. 병태는 두철의 딸 영애에게 접근하여 목각인형을 깎는 것을 가르쳐주며 접근을 한다. 병태가 준 곡으로 뮤지컬오디션에 언더스터디로 도미는 합격을 하고, 춘삼은 사기친 친구를 만나고, 영애는 목각인형을 멋지게 만들어 낸다. 이를 기뻐하기 위해 두철과 영애, 춘삼, 도미는 기쁜 마음으로 고기잔치를 벌이는데, 피투성이의 병태가 등장하는데……

 

 

 

 

 

 

 

극단 배우세상이 공연하는<칼맨>(김태수 작, 윤우영 연출, 인간소극장, 4.5-7.1)은 이름부터 심상찮다. 칼맨이라니, 혹시 비제의 카르맨의 패로디인가. 그러나 내용을 보면 그저 '칼질하는 남자'일 뿐. 작가는 칼과 남자를 비정상적인 한국어 조어법으로 결합시킨다. 순수국어와 외국어의 결합, 이 부자연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칼을 휘두르게 만들어야 한다. 이 작품에는 중요한 세 남자가 등장한다. 여동생의 원수를 갚으려고 깡패 두목을 찾아 복수를 꾀하는 마병태, 친구에게 사기당하고 그 친구를 응징하기 위하여 칼을 품고 다니는 공춘삼, 그리고 칼질에는 도통했으나 이미 세속적 칼쓰기는 초월한 식육점 주인 우두철이 그들이다. 겉으로 보기엔 이들이 칼을 잡는 이유가 다 다르지만, 칼이란 무엇인가를 베고 자르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칼을 휘두른다는 것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함인 것, 결국 이들의 이야기는 현대판 무협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협지도 잘만 쓰여지면 품위가 생기는 법, 보여주기에 따라서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감수성도 획득할 수 있는 법이 아니던가. 작가는 자칫 하찮은 칼부림 정도로 끝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나름대로 상처받은 인생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을 줄 안다. 칼날의 번득임만큼이나 재치와 유머도 돋보인다.

 

 

 

 


작품의 무대는 식육점 주인 우두철의 살림집 뒷마당이다. 그의 집에 세들어 사는 공춘삼과 마병태, 그리고 밤무대 가수 하도미와 우두철의 딸 우영애의 짓밟힌 삶이 맞물리며 보여진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다분히 작위적이다. 모든 사건이 각각의 칼을 중심으로 전개되다 보니 통합된 일관적인 사건 진행은 따로 없고 너무 많은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마병태가 놓여 있다. 그의 도움으로 깡패에게 한 쪽 다리의 인대가 잘려 자폐적인 삶을 살던 우영애는 자아를 찾고, 하도미는 밤무대의 깡패들에게 쫓기면서도 결국 뮤지컬 주연에 대한 꿈을 성취한다. 마병태는 우영애에게 인형 목각의 재주를 발견하게 해 주고, 하도미에게는 뮤지컬 주연의 악보를 전해 준다. 그러나 이렇게 사건의 핵심 역할을 하는 마병태의 성격이 불분명한 점, 종횡무진으로 이야기를 풀어 놓는 마병태의 성격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은, 자칫 그를 무협지를 많이 읽고 무림의 고수가 된 관념적인 무협으로만 보이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마병태는 깡패들에게 살해된 여동생의 복수를 위하여 우두철이 숨겨 놓은 '천검'을 훔쳐 끝내 깡패 두목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칼부림의 주인공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동생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가슴에 품고 있는 마병태의 인간적 고뇌는 그 어디에도 없다. 관객은 그의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와 과장된 표정에 감동하고 웃다가 갑자기 인생의 고뇌를 짊어진 의리의 젊은이로 탈바꿈하는 그의 화려한 변신에 당황한다. 이 때문에 우영애의 자아 찾기 과정도 비약이 심하고, 딸에 대한 아버지의 고통에 찬 애정도 미약하게만 드러날 뿐이다.

 

 

 

 


작가의 의욕만큼 연출도 많은 것을 보여 주려 애쓴다. 열악한 무대 조건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으나, 식육점의 내부와 외부 통로를 연결해 주는 등퇴장에 일관성이 결여되고, 몇몇 칼부림을 위해 무대 후면을 깜깜한 사막(寫幕)으로 시종일관 비워 놓은 것은 리얼리즘 무대의 조화를 깨트린다. 작가의 메시지인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칼을 하나씩 품고 있다', '제 칼에 맞으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는 화두가 그저 작가의 관념으로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은 많은 사건들이 지나가 버리기만 하고 그림[畵]으로써 무대 위에 제대로 풀어지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진정 우두철이 '칼맨'인 이유는 칼을 잘 써서인가 쓰지 않아서인가. 고수는 쓰지 않아도 쓴 것과 같고, 써도 쓴 것 같지 않을 때가 아닌가. 불구가 된 딸의 비극을 감당하면서까지 '천검'을 간직하기만 하고 휘두르지 않는 면모는 진정 무림의 고수인 듯해 보이지만, '살기가 뻗친 칼 하나 있다'는 스님의 말 한 마디에 살의를 포기한 고수는 자기가 고수임을 다른 식으로 보여 주어야 할 듯하지 않을까. 관객들에게 보여 주는 다양한 팬 서비스는 즐겁다. 시종일관 웃으며, 마병태의 모험담에 함께 동참할 수 있는 무협지의 세계는 즐겁다. 그러나 진정 '칼맨'의 고수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평자만의 무감각 때문일까. 불현듯 소 몸뚱이 조직의 자연의 이치에 따라 칼을 움직이기 때문에 19년 동안 칼을 갈지 않으면서도 항상 새 칼처럼 칼을 놀린다는 {장자} 속의 도통한 백정 이야기와 결투에서 상대의 허벅지의 뼈가 앙상히 드러나도록 칼을 휘둘렀는데도 정작 쓰러지는 적장은 자신의 다리가 그 지경이 되는 지도 모르고 있었던 어느 중국 무협 영화[신용문객잔]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 것은 어인 이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