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고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한 그 무시무시한 사랑이야기.
작품 속 주인공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던 날에 찾아왔으나
온 줄도 모른 체 떠나가 버린 그 ‘사랑’을 평생 안고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모자란 사랑의 대가로 여동생의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 잡은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지만, 그 ‘사랑’을 원망하고 증오할 수가 없다.
그 ‘사랑’은 그에게 처음이었고,
다시는 꿈꿀 수 없는 유일한‘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움을 내색할 순 더더욱 없다.
그 ‘사랑’으로 인해 치룬 대가가 너무나 컸었기에...
1980년대 초중반 정권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온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은, 1987년 1월 초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최고점으로 치달았다. 정권은 사건의 진실을 덮으려 했지만 동아일보의 연이은 특종보도로 무산됐다. 그럼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간선제를 고수하겠다며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해 5월 정권이 박종철 사건을 조작 축소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고,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경찰 최루탄에 맞아 사경에 빠져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범야권 연합조직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에서 일제히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정권은 강경 진압에 나섰지만 평범한 회사원들까지 연일 시위에 동참했다. 6월 26일엔 전국 33개 도시에서 100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결국 6월 29일 당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는 ‘6·29선언’을 발표했고 전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군부정권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6 29가 보낸 예고 부고장>은 당시의 상황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때 민주화 투쟁을 하던 친구들과 연인들을 등장시켜, 당시를 무대 위에 재현시키고, 그리고 30년 가까이 된 지금, 주인공은 다시 6 29를 맞이한 날에, 금배지를 달거나, 고위공직자가 되거나, 기업의 수장이 되어 부패와 타락양상을 보이는 친구들에게 한 통의 부고장을 보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친구들의 초기의 순수의지와 양심회복을 바라는 일종의 애국적 정신쇄신기원연극이다.
사법시험은 1,2,3차까지 치러야 하고, 객관식인 1차, 주관식인 2차, 그리고 3차 면접시험까지 통과해야 합격판정을 받는다. 2차 시험에서는 당시 유신헌법을 기초한 갈봉근이나 문홍주의 유신헌법, 김증한의 민법, 황산덕의 형법, 서돈각의 상법을 깊이 공부해야 합격점에 도달할 수 있었고, 설사 2차에 합격을 했더라도, 3차에서 유신헌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면접관 앞에서 한마디라도 내 비추면, 합격이 취소되고, 실제 그러한 발언으로 불합격을 한 인물이 있다.
연극에서는 당시 민주화 투쟁에 앞장을 서거나, 가담한 인물들의 행적이 묘사된다, 공돌이나 공순이로 불리던 말단 근로자, 그들을 일깨워 근로조건향상을 위해 투쟁하도록 이끌던 기업인의 아들, 함께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동창, 그리고 연예인 지망의 재벌 기업가의 딸, 그리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주인공과 그가 사랑하던 여인이 등장해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게 되는 과정과 이별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극 속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사법고시생의 부모는 실향민으로 설정되고, 그가 행방불명이 되자, 적색분자로 낙인을 찍는 등의 당시의 정국이 반영된다. 민주화투쟁을 하던 청년시절의 그들이 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던 정황이 극에 그려지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의 자아와 또 다른 자아가 동시에 등장해 벌이는 갈등과정은 명장면이다.
필자는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21세기의 부름을 받았다고 자타가 공인했던 ‘386세대’출신이다. 동기와 선후배들이 정치·사회·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심축으로 활동하는 것을 지켜보며 어깨가 으쓱했던 적도 많았지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문제성 잡음들로 인해 낯이 뜨거워졌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학창시절을 되돌아보곤 했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눈이 부시게 푸르렀던 날들. 그때 우리가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을 위해 주먹을 불끈 쥐어야만 했던지···.
이 작품은 한 때 세상의 중심축인양 군림했던‘386’세대들의 동기가 쓰는 반성문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와 같은 85학번 동기동창들이다. 이들은 서로의 가치관 혹은 필요에 따라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나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였고, 여전히 친구인 상태(?)다. 불협화음 속에서도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저마다 안고 있는 상처를 통해, 세대를 떠나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선택적 갈등에 대한 성찰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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