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개의 왈츠'

clint 2015. 10. 30. 16:33

 

 

 

 

 

 

<개의 왈츠>의 주제는 '계획되고 실행되었으나 완성 되지는 않은' 범죄다. 이 범죄의 원인은 해결 방법이 없는 상태에 빠져 있으며 모든 것들로부터 그리고 모든 이들로부터 소외당한 인간의 본연적이며 존재론적인 고독이다. '고독의 서사시'라는 부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개의 왈츠>에서는 모든 것들이 '암울하고 엄격하며 닫혀 있으며, 모든 말을 다 내뱉지 않았고 미소가 거의 없이 매우, 매우 이상하다'. 이 묘사는<개의 왈츠>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정확한 표현으로, 이 극의 제목 속에 숨겨진 비밀스런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가정을 더없이 훌륭하게 지지해주고 있다. 생각해보자. 왜 난데없이 '개의 왈츠'인가? 관객들에게 이 제목은 놀라움과 어리둥절함만을 주었다. 작자는 도대체 무엇을 노렸던 것일까? 이러한 제목이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며, 안드레예프는 이 제목 속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개의 왈츠>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합리성을 부정하는 비극의 가장 비밀스럽고 잔인한 의미다. 세상과 사람들을 실로 잡아당기거나 설탕 조각을 보여주면서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는 춤추는 개들에다 비유하는 것은, 성물 모독일망정 절대로 단순하고 멍청한 무례함 은 될 수 없다. 안드레예프는 현세적인, 즉 물질주의적인 존재와 그것을 극복해 내는 범우주적인 존재를 명확히 대립시키고 있다. 작가의 염려에도 불구하고<개의 왈츠>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들은 마치 다들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이 희곡에서 볼 수 있는 세상과 삶의 허무함을 향한 고독한 인간혼의 절규에 대해 이야기했다.<개의 왈츠>라는 제목을 둘러싼 이러한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안드레예프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개의 왈츠'는 미스터리 극으로서, 종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서두에 장송 행진곡을 연주해야 한다."
<개의 왈츠>는 줄거리와 플롯의 전개에서도 뛰어나다. 사실상 이 희곡에서는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단 하나의 사건만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은행에서 일하는 젊고 잘나가는 남자 주인공 겐리흐 틸레가 자신의 약혼녀인 엘리자베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편지로 겐리흐는 엘리자베타가 자신보다 더 부자인 다른 남자에게 이미 시집을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날카로운 극적 자극으로서, 이후에 발생하게 되는 긴박한 내외부적 상황들의 시발점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겐리흐는 영혼의 세속적 상태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멸망성과 함께 그 영혼이 태초의 우주적 이상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한편 끊임없이 겐리흐 틸레를 기만하는 그의 동생 카를 틸레는 형의 오랜 지인인 페클루샤까지 끌어들여 그로부터 돈을 착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나간다. 여기에서 안드레예프에게 중요했던 것은 가능한 범죄 행위 자체가 아니라 범죄에 대한 이들의 대화였는데, 극 초반부터 그러했듯이 카를과 페클루샤는 마지막 순간까지 겐리흐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인물들로 있었다.
2막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 엘리자베타도 매우 흥미로운 인물인데, 그녀는 자신의 활발함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된다. 극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허공을 향한 독백'들을 쏟아낸다. 이 독백들에서 그녀의 고독과 멸망, 예정된 그녀의 운명이 드러난다. 겐리흐에게 했던 약속을 그녀 스스로가 배반하고는 더 부자인 남자에게 시집가 버렸던 그 순간부터 마치 그녀의 머리 위로 어떠한 천명이 내려앉은 듯하다. 그녀는 밤의 암흑 속을 의미 없이 헤매다니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부득이하게도 그녀의 배반은 그녀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배반들을 불러일으켰다. 일종의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인데, 이리하여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웠던 상황이 더욱 첨예화된다. 안드레예프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멸망을 풍기는 분위기를 극이 진행될수록 점진적으로 고조시켜 간다.
겐리흐 틸레는 자기 시대와 사회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산적이고 사회적 성공을 향해, 그리고 마침내 는 범죄를 향해 달려갔었다고 해서 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겐리흐에게 일어난 변화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면 물질주의적 세상이 그의 지각을 부정적으로 바꿔 놓은 것이지, 겐리흐 자신이 세상을 배신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끝까지 자신에게, 태초의 우주혼과 그 뿌리를 함께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스스로에게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약혼녀에게 배신당한 1년 후의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아파트 안 모든 물건들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채 여전히 행복을 기다리고 있다. 겐리흐는 더 망가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 늘씬하고, 더 절도 있으며. 어느 성도는 더 충직해지기까지 했다. 언뜻 보기에 그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만 같다. 1년 전 그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던 엘리자베타의 그 끔찍했던 편지는 마치 없었던 것만 같다. 외형으로 보기에 겐리흐는 이미 오래전에 엘리자베타를 잊어버렸으며 더 이상은 아이들이 넘쳐나는 행복한 집에 대한 꿈도 꾸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다. 카를과 엘리자베타의 야간 산책은 겐리흐가 문제의 편지를 받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아파트의 상태에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치 그 순간 얼어붙어 버리기라도 한듯, 사건 이후 아파트는 조금도 더 꾸며지지 않았다. 모든 물건들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며, 이러한 아파트를 바라보던 엘리자베타는 그 안에서 마치 범죄라도 저질러졌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제4막에서 엘리자베타는 다시 이 아파트를 찾는다. 그 녀는 남편과 아이를 잃고 홀로 남은 상태다. 엘리자베타는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겐리흐가 완전히 황폐해져 버린 결과라고 생각한다. 2막에서 변하지 않은 방의 모습이 엘리자베타에게 긍정적인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면, 지금의 이 먼지와 석회, 거미줄 등은 그녀를 두렵게 하고 있다. 그녀는 이 공간에 서서 한때 자신이 버렸던 겐리흐가 이제 이 방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황폐하고 고독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미 한번 겐리흐에게 돌아갔었으나 용서받지 못했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를 부르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겐리흐 자신이 이렇게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던 적이 있었다. 엘리자베타는 겐리흐의 황폐함을 보여주는 그 방에 서서 허공을 향해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는 방 안의 물건들에게서 사랑하는 이의 영혼의 작은 한 부분이라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겐리흐가 도망가도록 만들게 될 뿐이다. 겐리흐의 역할이 끝나 간다. 그는 삶에서의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이행했으며, 그처럼 훌륭하게 세상과의, 아니 이제는 이미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끝내고자 한다. 겐리흐는 알 수 없는 어떠한 존재가 자신의 아파트로 내려왔음을, 그리하여 자신이 타락과 배반에 가득 찬 이 세계를, 이미 오래전에 태초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이 세계를 떠 나버릴 것을 종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작고 귀여운 이들을 가지게 되고, 그 아이들을 위해 햇살이 가득한 밝고 따뜻한 방을 마련해 두려던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소망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성실한 한 개인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이 작은 소망은 본연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현 세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운명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궁지로 내몰렸던 희생물은 죽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개의왈츠>의 결말이다. 주인공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비상구를 찾아 헤맨다.

 

 

 

 

이리하여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던 함정의 문은 영원히 닫혀 버렸으며, 그는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사회적 성공과 세속적인 안정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삶이라는 축복된 시간을 단순하고 수동적인 '개의 왈츠'를 추는 데 허비하고 있던 주인공 겐리흐 틸레는 자신의 화려하던 인생이 한번에 '꺾이던' 그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스스로의 삶이 얼마나 잘못 되어 있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이 원래는 하나의 '우주 혼'을 이루고 있었던 분자들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그는, 스스로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었고, 이 때문에 존재론적인 고독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 삶 자체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는데, 이 회의는 배신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회의로서, 그제야 주인공은 변질되어 버린 세상과 자신의 비유기성을 느끼게 된다.
겐리흐는 그의 꿈이 무너진 이후자신의 꿈이 시작되었던 장소인 '볕이 잘 드는 아이들 방' 에서 슬퍼한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방이 단순히 주거 공간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 방에 꿈을 주었고 희망을 부어 넣었던 겐리흐에게 그 방은 단순한 공간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하나의 정신적 존재였다. 겐리흐가 자기 마음의 일부를 떼어내어 그 사물에, 그 공간에 전달했기에, 그들 또한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적 세계를 구성하던 에너지의 일부를 그에게 흡입시켜 준 것이며, 이는 곧 그들의 정서적 공감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인간에게 사물이나 자연현상과 같은 마치 죽어 있는 듯 보이는 존재들이 하나의 생명체로, 그것도 공동의 정신적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존재로서 다가오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인간이 우주는 하나라는 단순한 원리로서 순수하게 그들을 대할 때라는 단순한 이론이 범심론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겐리흐는 본연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우주 적 본체와의 결합을 통해 세속적이고 허망하며 이 무서운 삶이란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 내고자 했다. 겐리흐는 끔찍하리만큼 외로웠으며, 이 외로움은 세상과 조화롭게 하나 되지 못한 잃어버린 영혼의 통곡이었다. '텅 빈 총소리'만을 남긴 채 겐리흐는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텅 빈 아파트에는 아직도 그의 꿈이 남아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모든 희망이 녹아 있는 이 아파트 자체가 그의 꿈이었던 것이다. 아파트와 그 안의 물건들은 주인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누었고, 주인은 태초의 우주 혼으로 돌아가 다시 그 일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독히도 외로웠던 주인이 더 이상은 외롭지 않기 위해 떠나간 그 자리에는 이제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진, 그리하여 자신의 '영혼' 또한 없어진 아파트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제 이곳엔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