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미하일 불가코프 '백위군'

clint 2015. 10. 31. 09:36

 

 

 

 

 

 

미하일 불가코프는 소비에트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현대 러시아인 사이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산문작가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내게 산문과 희곡은 피아니스트의 오른손, 왼손과 같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그의 문학세계에서 다양한 양식의 문학 장르들을 볼 수 있고 특히 한 장르에서 다른 문학 장르로 ‘번역'한 훌륭한 실험들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소설인 《백위군(》을<투르빈 가의 나날들〉이라는 희곡으로, 희곡<위선자들의 밀교>(몰리에르 작)를 토대로 《몰리에르의 삶》이라는 소설로 개작한 것 외에도 불가코프는 다른 작가들의 산문 작품을 희곡으로, 고골의 《죽은 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영화 시나리오로 프리예프와 함께 고골의<죽은 혼>을 같은 제목으로, 카로스티니와 함께 고골의 《검찰관》을<특별한 사건, 또는 검찰관>이라는 제목으로 개작하기도 했고, 볼쇼이 극장에서 일하던 시절 네 편의 오페라 리브레토(<미닌과 포자르스키>,<흑해>,<표트르 대제>,<라셀>를 창작하기도 했다. 불가코프가 자신의 자전 소설인 《백위군》을 희곡으로 개작한<투르빈가의 나날들>은 긴 창작 역사를 지닌다. 아직 의사의 길을 걸으며 블라디갑카스로 발령을 받아 일하던 시절 (1920-1921) 집필한<투르빈의 형제들>이 소설《백위군》(1923-1924)을 거쳐서 같은 제목을 가진 희곡으로 개작되었으나(1925년 6~9월), 이후 극장의 요청과 검열의 이유로 여러 번의 교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투르빈가의 나날들>(1926년)이라는 제목을 갖게 된다. 소설에서 희곡으로의 개작, 그리고 여러 번의 수정과 편집과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설 《백위군》의 일부는 1925년 초에 출간된 잡지《러시아》의 4호와 5호에 각각 발표되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결국 발표되지 못했는데 그것은<러시아》 의 6호가 출판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1927년에서 1929년 사이에 불가코프에 의해 파리의 '콩코르데'와 리가의 '모두를 위한 책' 출판사에서 전편이 출판되어 나오게 된다. 희곡의 경우 불가코프는 1925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부터 소설 《백위군》을 모티브로 한 희곡을 써줄 것을 요청받는다. 이렇게 해서 1925년 6월과 9월 사이에 완성된 희곡 '백위군' 은 첫 번째 판본이다. 희곡은 예술극장의 대극장에서 상연되기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10월 21일 첫 번째로 배우들에게 역할을 배정하기로 예정되었다. 이후 연극 제작에 대한 주요 작업은 1926년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희곡의 제목과 텍스트의 세부 내용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마침내 그해 1926년 8월 24일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불가코프, 예술극장의 문학부 장이었던 마르코프는 희곡을 전체적으로 수정해 최종 본을 만들어내고 제목도<투르빈가의 나날들>로 결정짓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세 번째 판본인 희곡<투르빈가의 나날들>은 1926. 10. 5일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 되었다. 불가코프의 희곡은 오늘날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극장들 고리키 므하트 극장, 모스소베트, 체호프 므하트 극장에서도 꾸준히 공연되는 주요 레퍼토리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현대 모스크바의 극장들이 연극의 제목을 초연 당시의 제목인<투르빈가의 나날들>이 아니라,<백위군>으로 명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가코프는 자신의 소설 《백위군》을 개작한 희곡의 제목 역시<백위군>으로 붙였으나 검열을 의식한 극장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상연 직전에 희곡의 제목을<투르빈 가의 나날들>이라고 변경해야만 했다. 현재 불가코프의 희곡은 여러 판본이 존재하고 작가 자신의 필사본이 부재하며 심지어 타자 판 원고도 부재하기 때문에 희곡의 원본을 구별해 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현대 연극 무대에서 희곡의 본제목인<백위군>이라는 제목으로 상연되고 심지어 소설이 희곡텍스트로 각색되는 가운데 생략된 여러 부분들을 연극 장면에 포함시키는 것은 극작가의 본래 의도를 되살리고자 하는 연출가들의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2004년 3월 체호프 모스크바예술아카데미 극장에서 초연한<백위군>에 대한 여러 기시들에서 한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소설에서 희곡으로 개작하면서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불가코프는 자신의 희곡 텍스트에 소설에서는 의미적, 구조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도시'와 관련된 장면들을 과감하게 삭제했다. 그 결과 희곡에서 거대한 도시의 형상은 텍스트 내부로 사라지고, 텍스트의 전면에는 투르빈가의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예술 공간은 투르빈가의 '집'이 된다. 여기서 작가의 주요한 관심은 러시아 인텔리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쏠리게 된다. '집'은 등장인물 중 한명인 라리오시크의 말처럼 거대한 '기선'으로서 역사의 소용돌이라는 파도 속에 출렁이며 끊임없는 항해를 하는 주인공들과 운명을 같이 한다. 쓰러져 가는 조국의 형상은 곧 그들을 길러 낸 '집'의 쓰러져가는 모습이며 그 집과 함께 오랜 세월 존재해왔던 가족의 전통과 가치, 문화가 사라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불가코프 주인공들의 비극이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종말론적 위기의식, 불안한 감정들이 즐겁고 흥겨운 등장인물들의 대화 이면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농담과 웃음으로 어우러진 일련의 대화들은 무대 뒤, 곧 집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사건들 - 총소리와 흉흉한 소문들 - 에도 불구하고 독자 및 관객들로 하여금 따스하고 인간적인 투르빈가의 분위기에 젖어들게 한다. 우리는 투르빈 가의 온기와 기운이 여전히 삶의 질서를 보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언 미실라옙스키의 발을 녹여주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따뜻한 목욕물로 씻겨 주는 집은 치유와 회복의 장소가 된다. 이렇게 투르빈가의 집은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는 가족의 심장으로 일종의 상징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로 의인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 대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내면의 갈등과 심리적인 움직임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 고뇌와 울분이 특히 주인공 알렉세이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비극적 어조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생도들을 향한 알렉세이의 처절한 외침에서다. 그는 쓰러져 가는 나라와 역사의 거대한 움직임 사이에 화해될 수 없는 불일치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집'을 둘러싼 도시와 이 나라 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단순한 한 국가의 파멸을 넘어 서서 '고귀한 정신'의 파멸이며, '인간 정신'의 파멸인 것을 깨닫는다. 불가코프는 주인공 알렉세이의 인간적인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알렉세이는 의미 없는 전쟁터로 내몰린 젊은 생도들과 장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방어하다가 결국 페틀류라 부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알렉세이의 운명은 러시아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러시아 지식인들의 운명이다. 바로 이것이 희곡<백위군>의 주제이며, 이후 불가코프의 많은 작품들에서 계속 반복되는 주요한 창작의 주제다. 희곡의 마지막 장면에는 행복했던 지난날들을 상징하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서있다. 많은 어려움들 - 알렉세이의 죽음, 도시 함락, 볼셰비키 입성 - 을 극복해 낸 주인공들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어려움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외적인 시련을 내면의 강건함으로 이겨낸 이들 주인공들에게 새로운 세상은 볼셰비키가 세우는 새 국가가 아니고, 투르빈가의 기족과 친구들이 지켜온 '집'을 변함없는 사랑으로 보존해나가는 세상이다. 투르빈가의 집에는 다시 가족과 친구들, 심지어 아래층 주인집 내외인 바실리사와 반다까지 모두 함께 모여 식탁에 둘러앉는다. 이 장면이 1막의 첫 부분과 아주 유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술잔이 오가고, 니콜카의 노랫소리, 레나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에 대한 칭찬의 말들, 농담이 집안을 채운다. 라리오시크는 축배의 인사말을 통해 주인공들이 겪었던 시대적 아픔을 ‘풍파'로, 그들이 함께 살아온 '집'을 '기선'으로 비유하며, 여전히 라리오시크 유머로 재미있게,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극을 마무리 짓고 있다.

 

 

 

1막의 첫 장면과 4막의 마지막 장면이 유사한 점, 투르빈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공동체가 '기선'으로, 그들의 집이 항구로 비유되는 점, 항구에 다다른 기선의 비유 등은 희곡텍스트를 고리 구조로 볼 수 있게 한다. 계속된 수난을 겪지만 투르빈가의 집은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희곡의 첫 장면처럼, 비록 알렉세이는 없지만, 모두가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다. 실제 역사 무대 뒤에 '정적'으로 남겨지고 투르빈가의 집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인간의 역사가 유한한 시간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면, '집'이라는 공동체는 현실세계를 벗어나 어느덧 '영원한 세계'의 시공간 속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희곡<백위군>이 열린 결말을 가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희곡<백위군>은 극단적인 역사의 격변 속에서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인간 실존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비극적인 운명의 러시아 인텔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탐구하고 있는 작품이다. 투르빈가의 집과 게트만 궁, 페틀류라 부대의 장면들이 각각 아무런 연관성 없이 나열된 것 같지만 불가코프는 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집안'의 공간과 '집 밖' 공간사이의 거리, '초현실적인 시간'과 ‘역사’의 시간을 동시에 나타내는 이중 세계는 희곡의 예술적 시공간을 확장시킨다. 희곡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각각 서로 긴밀한 인과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렇다 할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희곡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은 알렉세이의 죽음이라기보다, 알렉산드로프 김나지움에서 알렉세이가 생도들에게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듯 외치는 연설 장면이다. 극 텍스트의 중심을 이루는 인과적인 사건을 이루는 연결, 그 결과 비롯되는 갈등과 뚜렷한 사건의 결말이 부재하는 불가코프의 희곡은 체호프의 전통을 잇고 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체호프는 극작품에서 삶의 총체적인 문제를 그리려고 한 대표적인 극작가다. 체호프가 고민했던 문제들을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새롭게 고민했던 불가코프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총체적인 인간 '삶'의 굴곡을 나타낼 뿐 아니라 러시아 인텔리들의 비극적 운명, 그들의 깊은 인간적 고뇌와 실존의 문제에 대해 성찰하고자 했다. 희곡<백위군>은 이 같은 작가 정신에서 기인한 첫 번째 작품이며 이 같은 예술 정신은 이후 창작되는 1920년대 희곡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백위군>은 그의 소설 《백위군》을 그가 직접 각색한 작품이다. 그는 소설 《백위군》의 첫 두 장이 출판되던 1925년 초에 같은 제목의 희곡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희곡의 필사본은 남아 있지 않고 극작가가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주요한 판본은 세 권이다. 1989년에서 1990년에 처음으로 불가코프 선집 (그러나 여전히 불가코프의 주요한 작품을 소개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장래에 학술 전집의 출판이 러시아 학자들의 과제로 남아 있다)이 출판되었을 때 편집자들에 의해 선별된 판본은 세 번째 판본이다. 소비에트문학, 극장 검열관들에 의해 희곡의 제목과 내용을 수정할 것을 요청받고 세 번째 판본에서는 희곡의 제목이<투르빈가의 나날들>로 바뀌게 되면서, 내용 역시 두 번째 판본과 큰 차이를 갖게 되었다. 모스크바예술 아카데미극장은 이 세 번째 판본을 무대에 올려 1926년부터 1941년까지 987회를 상연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불가코프의 희곡은 체호프 이후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전통을 잇는 주요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하는 불가코프의 희곡은 두 번째 판본이다. 이는 오늘날 두 번째 판본이야말로 검열을 의식하지 않은 극작가의 의도가 정확하게 표현되고 극작가로서의 불가코프의 빛나는 재능들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미하일 불가코프는 1891년 5월 15일 키예프에서 신학대학의 교수 인 아버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와 어머니 바르바라 미하일 로브나 사이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불가코프의 가정은 평범한 지방 소도시의 인텔리 가정이었다. 저녁마다 음악과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크리스마스 파티와 가족 공연으로 시끌벅적했던 그의 집은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에게 있어선 언제나 따뜻한 세계로 기억되었다. 이같은 풍경의 가족분위기는 이후 그의 소설 《백위군》과 희곡<투르빈가의 나날들<백위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가의 아버지인 아파나시 이바노비치는 시골 사제의 아들로 역시 사제의 길을 걸으며 신학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시에 그는 키예프 검열관에서 4등 문관으로 일하며 귀족 작위를 얻게 된다. 어머니인 바르바라 미하일로브나 역시 지방 교회의 집사 가정에서 자라난 독실한 정교 신자였다. 특별히 어머니는 에너지가 넘치고 선량한 여인으로서 자신의 모든 힘을 자녀들의 양육에 쏟았는데 바로 이 어머니의 영향으로 인해 미하일은 음악과 독서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아버지의 월급으로 아홉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빠듯했는데 1907년 아버지가 유전병이었던 고혈압 신장경화증으로 50세가 채 되기 전에 돌아가시게 된다. 미하일은 1900년까지 가정에서 재택 교육을 받았고, 이후 키예프의 일류학교인 알렉산드로프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1909년 김나지움의 졸업과 함께 미하일은 키예프대학 의학부에 입학한다. 진로를 결정할 당시 문학과 예술로의 길에 대해 고민했지만 결국 의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아직 학생이던 1913년, 그는 양가의 반대도 무릅쓰고 타티야나 라파와 첫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평범한 관리 집안에서 자란 타티야나는 조용하고 자상하며 눈에 띄지 않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가지고 왔던 넉넉한 결혼 지참금 덕분에 미하일은 의대의 마지막 3년을 유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는데 그것은 미하일이 내세운 조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미하일은 전방의 의무병으로 발령받아 전쟁터에서 외과 전문의의 지도 아래 수련을 받는 기회를 가진다. 이후 1916년 미하일은 우수한 성적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스몰렌스크의 작은 시골 마을 보건 의로 발령 받는다. 갓 의대를 졸업한 신출내기 의사가 시골 벽지로 발령을 받아 크고 작은 수술을 집도하고 환자들을 진료했던 이 시절의 이야기들이 그만의 독특한 유머와 쓸쓸한 어조로 그의 단편집<젊은 의사의 수기>에 잘 그려져 있다. 불가코프는 조국전쟁 시절을 키예프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키예프에서 14번의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 의사라는 이유로 볼셰비키에 의해서, 또 페틀류로프 정권에 의해서 전쟁터의 이곳저곳으로 동원되는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동원돼 갔던 블라디갑카스에 장티푸스가 도는 바람에 불가코프는 그곳에 발이 묶이게 된다. 단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불가코프는 볼셰비키의 일을 돕게 되는데 그의 일은 볼셰비키 적 관점에서 바라본 푸시킨과 체호프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고, 지방 극장을 위한 희곡을 창작하는 작업이었다. 1921년 그의 희곡인<물라의 아들들>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지금의 트빌리시(그루지야의 수도)인 티플리스 와 바틈으로 휴가를 떠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게 된다. 불가코프는 이곳에서 국외로 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그는 러시아에 남게 되고 결국 모스크바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모스크바는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비롯해 그의 일생에서 떼려야 멜 수 없는 공간이 되고 그의 주요 작품들<소설 《백위군>,<도망>,<개의 심장>,<극장 소설>,<거장과 마르가리타>등)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형상화된다. 1921 년 불가코프가 아내와 함께 모스크바에 왔을 때 사 실상 그의 수중에는 돈이 거의 한 푼도 없었다. 처음 두 달 동안 불가코프는 중앙정치 노동위원회의 문학부에서 비서로 일했지만 이후 오랜 시간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만다. 민영신문사를 들락날락하기도 했지만 신문사들은 갑자기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했고 심지어 유랑 극단의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으니 그의 처지가 얼마나 고달팠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스탈린의 신경제정책이 실시되면서 1922년 봄부터 불가코프는<구독>,<붉은 신문>과 같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신문 및 잡지들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게 된다. 이와 함께 1920년대 중반, 작가로서의 불가코프는 모스크바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24년 10월 말에 그는 중편 《악마의 서사시》와 《비운의 달걀》을 완성하고 이후 《개의 심장》, 소설 《백위군》과 이것을 개작한 희곡<백위군>곧<투르빈가의 나날들>을 창작한다.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된 희곡<투르빈가의 나날들>은 단번에 불가코프를 극작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하고 오랫동안 레퍼토리의 부재로 고심하던 예술극장이 체호프 이후로 다시 부활하게 되는 전환기를 맞게 해주었다. 심지어 스탈린이 이 연극을 열다섯 번이나 보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바흐탄고프 극장은 불가코프의 희곡<조야의 아파트>를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 레퍼토리 위원회에 의해 두 연극은 상연금지 명령을 받고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 1927년 작품인 희곡<도망>도 예술극장과 고리키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지만 무대의 빛을 받지는 못했다. 한편 1924년 불가코프가 본격적인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 지나치게 평범했던 첫째 부인과는 이혼하게 되고 자신의 문학 서클에서 만난 류보피 예브게니예브나 벨로제르 스카야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두 번째 부인과의 시절은 작가로서 불가코프가 황금기를 누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서는 그의 작품 중 한 작품도 무대에서 상연되지 못했고 그가 쓴 단 한줄의 글도 출판되지 못했다. 불가코프는 '국내 망명 작가’로서 굶주림과 죽음을 눈앞에 둔 채 1930 년 3월 28일 소비에트 정부를 수신인으로 하는 편지를 보낸다. 같은 해 4월 18일 소비에트를 대표하던 시인 마야콥스키가 권총으로 자살한 바로 다음 날 스탈린이 직접불가코프에게 전화를 한다. 이 전화 통화 이후, 외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던 불가코프의 청은 거절당하고 그에게는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일자리가 주어진다. 이후 1932년 희곡<투르빈가의 나날들>의 상연 허가가 난 것을 제외하고 그의 다른 작품들은 단 한 편도 이후 소비에트 무대에서 상연되지 못했고 한 줄의 글도 출판되지 못했다.
1929년 불가코프는 한 지인의 집에서 운명적인 여인과의 만남을 갖게 된다. 그녀는 바로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엘레나 세르게예브나 실롭스카야다. 두 아들과 자상한 남편을 둔 행복하고 부유한 가정의 아내였던 엘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후 불가코프의 소설<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마르가리타라는 여인으로 형상화된다. 1936년부터 불가코프는 볼쇼이 극장에서 일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네 편의 오페라 리브레토를 쓰지만, 역시 한 작품도 상연되지 못한다. 1938년 스탈린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예술극장은 불가코프에게 스탈린에 대한 희곡을 써줄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해서 1939년 7월 희곡<바틈>이 탄생 되었지만 결국 이 희곡도 상연 금지 명령을 받는다. 계속되는 상연금지 명령과 출판금지 등은 불가코프가 오랜 시간 투병해 오던 고혈압 신장경화증의 병세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미 1939년 중반부터 의사는 불가코프의 상태가 희망이 없음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코프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대한 창작을 계속했고 작업은 그가 죽기 3주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불가코프의 친구들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서 죽어 가는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주기를 요청했다. 1930년의 통화 덕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불가코프가 다시 삶 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친구들은 제2의 기적을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의 전화는 없었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40년 3월 10일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