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서문
20세기 초반의 한국 근대연극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로, 나는 당시의 공연들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직접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자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 늘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선구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과 내용을 가진 희곡 텍스트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당시의 관객 앞에 시청각화 하였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자료가 풍부하게 있어야 우리가 초창기 신극의 정체성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기술할 수 있을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그저 당시의 신문, 잡지에 실려 있는 리뷰나 회고 정도만을 자료로 가지고 간접적으로 공연의 모습을 짐작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제한되어 있는 기존의 자료들을 자꾸 재해석하려 들기보다는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 소개하고 공유하는 것이 한국연극학을 위해 더 시급하고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희곡 『뺨 맞는 그 자식』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뺨 맞는 그 자식』은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Leonid Nikolaievich Andreyev, 1871-1919)의 대표적 희곡이다. 이 작품은 1915년 10월에 러시아에서 초연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27년 11월에 綜合藝術協會의 제 1회 공연으로서 선을 보였다.
종합예술협회는 나운규, 강홍식, 이월화, 복혜숙, 연학년, 김동환, 김을한 등이 모여서 조직한 단체로서, 당시의 신문 보도에 의하면 “특히 명성이 높은 극인과 영화인들의 총집합이며 동시에 현금 조선의 이름 높은 문사 음악가 건축가 등도 가담”하고 있는 화려한 진용을 이루고 있었다. 쟁쟁한 배우들이 모였던 만큼 『뺨 맞는 그 자식』의 공연 평은 나쁘지 않았다. 당시의 신문 기사들을 살펴보면 공연을 칭찬하는 분위기가 대체적이고, “갈채와 찬양”이나 “대호평”, “만원의 성황” 같은 표현도 나타나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주로 여자 주인공인 콘수엘로 역의 이월화와, 남자 주인공인 광대 “그놈” 역의 강홍식, 사자 조련사 지니다 역의 복혜숙에 대한 칭찬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복혜숙의 연기가 가장 호평을 받았다.
『뺨 맞는 그 자식』 공연은 복혜숙 자신에게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던 듯하다. 복혜숙이 “빤짝빤짝 하는. . . 젖가리개만 허구 빤쓰만 입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자 객석에 와있던 그녀의 이화학당 선생 김활란이 “어머! 쟤가, 쟤가, 쟤가!” 하면서 놀라 자빠지고, 그녀의 아름다운 다리를 본 어떤 일본인은 “앗! 저 다리 좀 봐!”라고 말 하면서 졸도했다는 이야기를 복혜숙 스스로 전하고 있다.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155-156쪽 참고)
나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뺨 맞는 그 자식』 공연의 실체에 조금이나마 접근해 볼 만한 자료를 신문기사들 말고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번에 그 원작 희곡을 소개함으로써, 한국 근대연극사의 한 페이지에 의미 있게 기록되어야 할 공연의 모습을 한 걸음 더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문학 자체의 의미를 따진다면, 이 희곡의 주인공이 심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상과 진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동경의 강렬함에 독자는 감동과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나 역사적 맥락을 생각해 본다면 이 작품의 자기도취적 우울과 비관, 허무적, 퇴폐적 감수성이 오늘날이나 식민지 시대의 우리 땅에서 얼마나 공감을 얻으며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이 작품의 이러한 두 측면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뺨 맞는 그 자식』은 Victor Seastrom (1879-1960)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져 1924년에 발표되었고,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영화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종합예술협회의 인적 구성을 고려해 본다면,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원작 희곡의 공연 시도로까지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 희곡의 본문 안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그놈”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제목을 붙임에 있어서는 1920년대 종합예술협회가 올렸던 공연의 제목을 그대로 따서 “뺨 맞는 그 자식”이라고 표기했다. 우리 연극 선구자들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신 나의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특히 나를 위한 부모님의 이해와 헌신에 감사드린다.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나는 아직도 학문과 예술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19세기와 20세기 경계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극작가.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가난한 빈민촌에서 보낸 안드레예프는 이때의 인상을 자신의 작품들에서 묘사하고 있다. 1891년,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한 안드레예프는 생활고로 인한 호구지책으로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892년 그는 잡지 <별>에 굶고 있는 학생을 묘사한 최초의 단편소설 <가난과 부>를 발표했다. 1893년, 학비를 못내 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제적된 후 그는 모스크바대학교 법학부에 편입했다. 1894년, 사랑에 실패한 안드레예프는 자살을 시도해 그 결과 만성 심장병을 얻게 되었다.
1897년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고 모스크바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잠시 변호사로 일하다가 <모스크바 통보>의 법정 통신원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말 그는 신문 <파발꾼>에 법정 관련 기사를 쓰고, 체계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단편들에서 안드레예프는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가난에 시달리며 기쁨을 잃어버린 아이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 하층 관리들, 기술자, 부랑자, 거지, 도둑, 창녀, 아이, 어른 등 부르주아 도시의 무산자들과 이들에게 가중된 삶의 무게, 괴로운 노동, 계속되는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이와 더불어 안드레예프는 인간의 개성을 억압하고 인간의 정신적 독자성을 획일화하는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 고립된 인간과 단절된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안드레예프는 혁명과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독자적인 문학, 비정치적 예술을 추구했다. 1919년 9월 12일 뇌출혈로 핀란드의 시골 마을 네이볼에서 사망했다. 스탈린 시대에 안드레예프는 판금 작가로 분류되며, 1930년 이후 그의 작품은 소련에서 출판되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 1956년 복권되어 재평가되며, 그의 유해는 레닌그라드(현재 페테르부르크)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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