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장정일 '고르비 전당포'

clint 2015. 10. 30. 10:03

 

 

 

 

 희곡은 속도와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작가의 존재 방식과 자의식을 주제로 하고 있다. 작중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소설가 (제이)는 컴퓨터로는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다고 느끼고, 그 대신 젊은 시절에 사용했던 클로버 727타자기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어렵게 입수한, 골동품에 가까운 클로버 727을 도난당하고 다시 실의에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잃어버린 것과는 다른 클로버 727을 얻지만 소설가는 자신을 괴롭혀 온 강박관념과 죄의식에 짓눌린다. 컴퓨터에서 타자기로의 대체도 평화를 가져다주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찾아낸 것은 자신의 열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소설 쓰기에 대한 강박과 자해로 이르는 소설가의 추락 과정을 보여 주는 한편, 거기에 아이엠에프 직후의 서울 풍경을 함께 겹쳐 놓는다. 고르비 영감이 소유한 쇠락한 5층짜리 빌딩은 아이엠에프 직후의 서울을 상징한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능력자가 운영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는) 작은 전당포와 뉴욕에서 날아온 SM 여신이 차린 SM 클럽(상류충의 잉여 욕망이 낳은 변태적 욕망의 해방구)이다.
'정류장식 드라마'로 쓰인 이 희곡은 공간 이동이 많을뿐더러, 조각이 다 맞추어지기까지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새로운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 심하게는 동일한 등장인물마저도 장이 바뀌면서 극심한 인생 유전을 겪게 된다. 소설가는 백수로, 미용사는 조폭의 연인으로, 극빈한 휴학생 애라는 시에프 스타로, 오르간 주자는 유령으로, 은행원은 깡패로, 사무기 상사의 평범한 여직원은 타자기로. 이 희곡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속도감과 함께, 별개로 보이는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이 퍼즐 조각처럼 긴밀히 연관되는 추리적 요소가 강하다. 또한 현실성을 벗어난 괴기와 3류 만화를 보는듯한 키치적 요소, 엽기 코드가 혼재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필자가 발표했던 장편소설 '보트 하우스'의 각색임을 밝혀 둔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들을 희곡이나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또 희곡들을 소설로 재창작하는 작업을 통해, 소설, 희곡, 시나리오의 특성을 여실히 간파하게 되었다. 이 세 장르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은 소설이고, 제약이 많은 것은 희곡이다. 시나리오는 좀 이중적이다. 형식만 가지고 따지자면 시나리오도 소설만큼 자유롭지만, 제작여건 (대중성, 흥행요소, 기획우선)이라는 절대적인 제약이 개입되면서 희곡이 갖는 여러 제약을 상회한다. 희곡을 쓸 때 의식해야 하는 여러 가지 극작 규칙과 제약은, 쓸 때는 힘들지만 어느 순간의 극적 폭발을 통해 노고를 보상받게 해 준다. 제약이 없으면 극적 긴장이나 폭발을 축적할 수 없다. 영화적 기법에 가까운 극작 형식 '정류장식 드라마’로 쓰인데다가 실제로 영상 작업도 필요로 하는 〈고르비 전당포〉는 그런 의미에서 반전통적, 반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작품이다.

 

장정일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태석 '육교상의 유모차'  (1) 2015.10.30
오태영 '선(禪)'  (1) 2015.10.30
김지용 '메타'  (1) 2015.10.30
김희창 '방군'  (1) 2015.10.30
김지용 '공무도하가'  (1) 2015.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