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태석 '육교상의 유모차'

clint 2015. 10. 30. 15:48

 

 

 

모노드라마.
오태석의 술회를 참조하면 "'육교 위의 유모차'는 무슨 기념으로 세종 호텔에서 파티가 있었는데,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끼리 빨리 친해질 수 있도록, 간단한 연극을 하나 했으면 하는 요청이 실험극장으로 왔었어요, 그게 아마 이낙선 상공부장관이 만들어 놓은 파티였던 것 같은데…… 이를테면 소설 중에 꽁트가 있잖아요. 대 여섯 매로 되어있는 거. 그런 거를 해줄 수 없느냐는 거지. 오현경 형이 출연하겠다고 해서 내가 연출을 맞게 됐어요. 그 당시의 세태, 정말 우리가 정부를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그런 심정을 담았지요."
오태석은 '육교상의 유모차'를 통해 정부 정책의 신뢰성에 의문을 던진다. 그는 정부정책에 대한 야유를 소극의 형식에 담아내어 사회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려는 의도를 피력했다. 연출가 나영세 또한 이러한 의도를 인정하고 있었다. 나영세는 '육교상의 유모차'를 연출 하면서 크게 두 가지에 역점을 두었다. 하나는 해석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공연적인 측면이다. 그는 이 작품을 “표면상으로는 아동 건강복지를 위해 선동적인 도시인들이 폭발적으로 변모하고 폭주하는 도시 속에서의 위기의식을, 중산층 서민을 등장시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해석하고 “살롱무대의 쏠리스트 김동훈의 우스꽝스런 절규가 이지적인 눈물의 주시 속에서 소리 없는 파문으로 물결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이라고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짧은 공연 시간, 간단한 등장인물(1인극) 그리고 사회 비판적 전언으로 인해 이 작품은 심심치 않게 공연된다.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동훈이 펼친 1인극이다. 김동훈은 1969년 11월 5일부터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를 9개월 동안 공연하였고, 1970년 12월 4일부터는 매주 금요일 하오 8시에 「육교상의 유모차』와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를 까페 떼아뜨르에서 공연했다. 여기서 김동훈은 배우의 말을 남기고 있다.
"맞벌이부부, 교통난, 유아 우유, 유모차, 악덕업자, 공해, 수시로 변하는 뉴스 등 우리 소시민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이번 '육교 위의 유모차'에서도 나는 구김살 없는 한 시민의 표정만을 보이고자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황이 다른 두 개의 모노드라마를 똑같은 판소리. 꼭두각시 사설, 탈춤 둥 고유민속의 리듬에 관심을 갖고 이들의 현대적 의미를 더욱 적극적으로 대입해 봄으로써 정립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의 무대 문법을 이룩하는데 이바지해 보고자 한다.
김동훈의 해설은 「육교상의 유모차』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육교상의 유모차』는 당시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을 1인극 배우(유모차를 몰고 나온 아버지)의 입을 빌어 비판하고 있다. 배우는 입담을 통해 산적한 문제들을 관객들에게 동의를 얻어가면서 들려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짧고 할 이야기는 많아져서 화제의 빈번한 전환이 요구되었다. '육교상의 유모차'는 대략 20개의 크고 작은 화제를 엮어 만든 일종의 재담극인 셈이다.


 

 

극이 시작되면 육교라는 느낌이 드는 단 위에 목에 호루라기를 두르고 유모차를 밀고 있는 배우의 모습이 보인다. 녹음기를 동해 음악이 들리다가 그치면 다급한 목소리의 라디오 방송이 이어진다. '긴급 뉴스'를 전하겠다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곧 '저지 페이퍼'에 의해 뉴스의 내용은 차단된다. 대신 '보건우려처'의 특별 보호령이 방송된다. 3세 이하의 유아는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곧 외출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맞벌이 부부인 배우는 고민에 빠진다. 그들은 격일제로 교대하며 유아를 거리로 데리고 나가지만 한계를 느끼며 '식모'를 구하기로 한다. 당국의 높은 분들과의 면담도 생각해보지만 '바쁜 그들'이 들어줄 리 만무하다. 생각하다 못해 고위층 동창생을 통해 방안을 마련한다. 계를 하나 들어 처음과 마지막 번을 주고 곗돈을 내면 구할 수 있다는 식모이야기를 듣는다. 식모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된다. 배우는 무대 안쪽 그러니까 스텝들에게 녹음기의 문제를 제기한다. 배우가 등장인물의 기능을 수행하다가, 연기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음향장치까지 다루어야 하는 상황을 제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화제는 전환된다. 녹음기를 틀자 차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러면서 아가를 달래는 아빠의 노래가 시작된다. 그런데 그 노래는 희화화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빠와 아가의 위치가 살짝 뒤바뀌기 때문이다. 위험에 빠진 아가와 당황한 아빠는 서로 놀라 제정신이 아니다. 이러한 상태를 확대해석하면, 어지러운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의 혼란으로 볼 수 있다. 아빠와 아가 모두 이 사회에서 사는 것이 어렵다. 이 사회는 자동차가 마구 달려드는 도로 한복판이나 마찬가지이고 싫어도 거리로 나서야 하는 강압적 규율의 압제 하에 있다. 위의 노랫말은 걱정스럽고 불편한 아빠이기보다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아기이고 싶다는 무의식의 표현이다. 아빠는 아기를 데리고 위험한 차도로 나와야 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골목길은 아이를 데리고 외출한 가족으로 이미 만원이고 그나마 골목길이 일방적인 신호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위험지대로 나섰다는 것이다. 그때 배우는 객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가장하고 “서울운동장엘 가라고요”라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1인극에서 상대를 가상하고 대답을 끌어내는 방식인데, 여기서는 서울에서 가장 큰 공지를 가지고 있던 서울운동장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목적에 입각하고 있다. 서울운동장은 잠겨 있다. 서울 시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잔디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서울 운동장을 생각하고 외출했던 이웃집 사람은 가는 도중에 몇 번이나 딱지를 떼어야 했다. 비좁은 서울의 문제와 시민들에게 무심한 도심정책을 은근히 비꼬는 설정이다.
아빠는 보건우려처의 엉뚱한 상상력을 소개한다. 낮잠 자는 시간, '시에스타'를 만들자는 건의이다. 그 시간에는 시내의 모든 차들이 운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유모차의 외출을 권장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다. 하지만 그 정책의 피해는 적지 않다. '국력에 미치는 위기도'와 '지엔피에 끼치는 손실'을 감안할 때 국가적 손실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을 펼 때 경고 호루라기가 들린다. 배우의 말이 국가기밀의 누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두려워하며 곧 언동을 중지한다. 화제는 전환되고 유모차의 합승, 그러니까 아이의 입석이 허용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소개된다. 아빠는 이렇게 되면 아이의 고통이 클 것이라며 반대한다. 지하도로 가는 방안도 검토된다. 그러나 지하도 통행법 저촉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유모차를 끌고 갈 곳이 없는 서울의 모습이 드러난다. 말도 안 되는 법령으로 인해 시간 낭비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시민의 모습도 드러난다. 결국 아빠의 결론은 육교 위이다. 그는 아이를 안전하게 데리고 외출하고 자신도 편리하게 법령을 준수하기 위해서 육교 위로 유모차를 가지고 온 것이다.
여기서 다시 화제가 전환되고(이 화제 전환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김치 이야기가 끼어든다. 아이 아빠의 아내, 즉 아이의 엄마가 담근 여든일곱 포기의 김치가 상한 사건이 발생한다. 기상대로 전화해서 한랭 전선을 끌어오라고 우기는 일화도 소개된다. 아이를 둘러싼 아내의 불만도 나타난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이를 시골집으로 보내던가,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선포한다. 국가 정책으로 인해 혼란에 처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면서 돌아갈 시간을 알리는 통제 소리가 전달된다. 아빠는 유모차를 끌고 내려가야 하는데, 올라올 때는 쉬워도 내려갈 때는 어려워서 몇 번 재촉을 당한다. 딱지를 끊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아빠는 딱지가 분유 몇 통 가격에 해당한다며 봐달라고 애원한다. 그때 시 경찰국의 특별담화가 발표된다. 유아외출 령이 '비위생적, 비생산적, 비교통적 비행'이며, 하반기 이상 기온이 계속되면서 유모차 생산자와 보건우려 처 직원의 담합으로 만들어진 결탁이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을 겪어야 했던 서울 시민들을 대표해서 유모차를 몰던 아빠는, 당초 협잡인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도 어린것의 인형을 대신 가지고 나왔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리고 배우의 입장으로 돌아와서, “여러분, 정말 제 아이를 데리고 나왔더라면 제 연극은 과연 결말이 달라졌을까요?" 라고 반문하며 극이 끝난다.
김동훈이 말한 내로 이 작품은 소시민이 겪는 일상과 소시민이 바라본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 짧은 시간만 허락된 연극이고 연극을 보는 사람이 정부 인사라는 점이 제약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중심에서 주도되는 사건은 부재한다. 구수한 입담과 재치 있는 설정으로 어떤 상황을 보여주는 것에 일차적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사건 전개가 피상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급작스러우며 전체적으로는 무리한 설정도 보인다. 가령 식모 이야기는 중간에 흐지부지 되었고 유모차가 육교 위로 올라가게 된 이야기는 유모차라는 기물을 염두에 둘 때 과장스러운 면이 많다. 아마도 이것은 서울시 교통 정책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여 지지만 유모차로 인해 그러한 혼란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억지스럽게 보인다. 김치 이야기나 기상대 이야기는 좀처럼 그 속뜻을 파악하기 힘들다. 단지 이상 기온이 일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 유모차 업자에게 위기감이 조성되었다는 설정이 깔려있는 듯하다. 작품에 깔려 있는 이러한 설정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반전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일단 시 경찰국이 유모차 외출이 불법이며 비리라는 점을 들추어낸다. 말도 안 되는 법령이 발표되었지만 말없이 따라야 했던 서울 시민의 애처로운 모습이 다시 부각되는 순간이다. 법령을 발표 하는 것도 정부이고 법령을 취소하는 것도 정부이다. 정부만이 이것을 할 수 있고, 시민들은 그것에 말없이 따라야 한다. 단 마음속의 불만까지는 정부도 어쩌지 못한다. 시민들은 겉으로는 순종하지만, 아이를 두고 인형을 데리고 외출함으로써 내면적 저항을 감행하고 있다. 확대 해석하면 당시 시민들이 겪는 고통이 크고 통제사회에 예속된 듯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불만을 갖고 반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해석은 '유모차'와 '외출'이라는 다소 가벼운 주제로 인해 표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작품 내부에서 웃음과 융화되어 흐르고 있다.
여기서 중대한 단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흥미위주의 유모차 외출이 갖는 가벼움이다.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이끌어내었던 공로는 인정되지만, 작품을 통해 작가의 전언을 정심하게 보여주기에는 부족한 설정이 아닌가 한다. 또 배우 본연의 입장으로 돌아와서 펼치는 대사도 어색하다. 가령 녹음기를 자신이 직접 틀어야 하느냐고 묻는 설정이라든가 마지막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으면 결말이 달라졌을까, 라고 반문하는 기교는 참신하되 별다른 필요성올 느끼지 못 하는 장치이다. 마땅한 해답을 구하기도 힘들고 형식적으로 꼭 긴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말장난이 이 연극의 주조에 해당하지만, 말장난도 구조적으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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