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新春當選戱曲>1939년 1월 21일 (필명 여여현麗麗軒으로 발표)
이 작품은 동아일보가 주관한 1939년도 신춘문예 희곡부분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작품으로 발표연도인 1939년은 바로 일제 치하로서, 맞춤법 등이 현재 우리가 사용 중인 한글 맞춤법과는 상치되는바가 크다. 그러나 작품의 무대가 일본이고 또한 노동판 인부 등 조선인 빈민층이 기거하는 토목공사장의 밥집이므로 8도 출신 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탓에 사용하는 언어도 각이하고 특히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말도 다수 등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 金熙昌 선생님의 데뷔작을 소개함에 있어 부득이한 경우의 띄어쓰기를 제외하고는 일제하의 재일 동포들의 생활을 고스란히 보이기 위해 거의 원문 그대로 전문을 소개한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일본 땅에 건너가 노동 품을 팔고 살던 재일 동포 노동자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여실히 확인할 수가 있고, 대사를 통해 특이한 언어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 김희창
190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출신 집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 없지만, 그의 글에 축음기를 처음 접하던 때에 아버지가 의관을 갖추고 축음기를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학력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보통학교 4년을 중퇴하고 고등보통학교도 1년을 다니다 중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삶의 많은 시간을 이른바 ‘막노동판’이라 불리는 토목공사장, 탄광촌 등에서 노동일로 보냈다. 스무 살이 채 안되던 1926년부터 전국을 떠돌며 노동일을 하던 그는, 1932년 무대미술가 원우전의 밑에서 무대장치 제작을 도우면서 연극계에 발을 디뎠고, 프롬프터 등 연극계의 잡무를 맡으며 극예술연구회 등에 참가하게 된다.
1933년 그는 라디오플레이미팅이라는 단체에 참여하여 방송극을 썼다. 1933년은 조선어 전용 채널인 제2방송이 개시된 해이다. 이전까지의 라디오드라마는 라디오드라마연구회라는 단체에서 주로 맡았던 것에 비해 제2방송이 시작된 이때부터는 극예술연구회, 조선연극사 등의 연극단체, 동경학생예술좌, 연전문우회구락부 등 학생극 단체, 라디오드라마연구회, 서울라디오드라마동호회 등 라디오드라마를 중심으로 모인 단체들이 방송극에 참가하였는데, 라디오플레이미팅도 그 중 하나였다. 이때 김희창은<노차부(老車夫)>를 발표한다. 1934년부터는 일본의 관문터널 공사장과 사할린 서부 에스도루탄광 등을 떠돌며 노동일을 했는데, 그 시기인 1939년에 동아일보사의 신춘문예에 5막 희곡<방군(房軍)>이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극연좌(劇硏座) 소속이었고, 극연좌가 중심이 되어 수상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 축하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6년 경성방송국의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여<꿈의 공덕>등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동경 유엔군사령부 심리전과에서 작가로 활동했고, 1956년에 귀국하여 이후 타계 때까지 계속 방송극을 쓰며 살았다. 그의 1958년 단회물 드라마인<깊은 산 속에서는>는 음악도 없이 단 두 명의 출연자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 밀도 있는 작품으로 그의 최고작으로 꼽히며,<소슬한 바람>,<구두창과 트위스트>등의 단회물과 연속극<로맨스 빠빠>,<시계 없는 대합실>,<당쟁비화>등도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1980년대까지 계속 방송극을 썼고 텔레비전드라마로 연속극<기러기 가족>,<탑>같은 대표작이 있지만 주 활동 영역은 라디오드라마였으며, 드라마 작가들의 대선배로 인정받았다.
그가 영화에 간여한 것은 그리 많지 않으며 주로 자신의 방송극을 원작으로 제공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가 간여한 영화는 총 6편인데, 그의 라디오드라마가 영화화된<만고강산>(최인현, 1969)을 제외하고는 모두 196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1960년대 초의 한국영화의 중요한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그의 영화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이다. 1959년의 인기 방송극을 영화화한 것으로 드물게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1950년대 말 서울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해학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풍미했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극의 시발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또한 드라마를 영화화한<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심우섭, 1962)는 정의롭고 뚝심 있는 공과대학 출신이 비리와 맞서 성공하는 이야기로 같은 해 제작된 김영수 원작<신입사원 미스터리>와 함께 신영균을 듬직하고 정의로운 장남형 인물로 안착시킨 작품이다. 다음 해의<또순이>(박상호, 1963) 역시 그의 라디오드라마<행복의 탄생>을 영화한 것으로, 의지적이고 생활력 강한 여성 인물형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했다. 구전가요를 주제가로 삼아 인기를 모은<열두 냥짜리 인생>(이만희, 1963)은 그의 토목공사판의 경험을 살린 작품이다. 이렇게 김희창은, 라디오드라마에서 출발하여 영화로 이양되는, 1960년대 초의 중요 경향인 아버지 중심의 가족극, 강인하고 정의로우며 생활력 강한 젊은이들이 성공적으로 삶을 이끄는 내용의 영화의 핵심을 제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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