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기호 '탑고시원'

clint 2015. 10. 30. 08:54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고시원'은 고시지망생들이 법관이나 행정관료, 또는 외교관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꿈을 키우는 곳이었다. 그러나 199U년대 이후의 고시원은 가장 값싼 월세로 삶을 의탁할 수 있는 열악한 주거환경의 대명사가 되었다.
윤기훈의 '탑 고시원'은 고시원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어두운 치부를 드러낸다. 등장인물은 총5명이다. 30대 초반의 '명옥'은 길거리에서 어묵을 팔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은다. 그녀는 비슷한 연배의 '종섭'을 좋아한다. 주차관리원으로 살아가는 종섭은 어려울 때마다 명옥에게 돈을 빌리곤 한다. 40대 중반의 '도연'은 과거에 사법고시 1차에 수석까지 했다지만 지금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신세이다. 20대 후반의 주환은 고시원 주인의 아들로 고시원 관리자인 셈인데 별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동두천에서 흘러든 젊은 여성 '조지아나'가 새로 입주하면서 이들의 삶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총 6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매일 매일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지루한 삶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장면이 거듭되면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게 된다. 주환이 키우는 토끼 '리처드'가 자꾸만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명옥의 통장과 조지아나의 속옷도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어질러졌던 테이블은 치운 사람이 없는데도 말끔해져 있다. 후반부로 가면서 등장인물들은 귀신에 홀린 듯 대혼란에 빠지고 결국 두 개의 시간대를 오가고 있음이 밝혀진다. 하루건너 현재의 시간과 10년 후의 미래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설정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들의 삶에 별 변화가 없으리라는 비관적 인식을 깔고 있다. 급기야 도연은 미래의 시간대에 있는 날 고시원을 나가버린다. 이런 무의미한 삶이 차라리 빨리 지나가 버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옥은 10년 후 자신의 통장에서 종섭에게 '남편 용돈'을 꼬박 꼬박 입금하고 있음을 발견하며 더욱 희망이 용솟음친다. 그리고 미래의 시간에 도연의 처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놀라며 도연이 열심히 살아가면 10년 후에 아내와 재결합 할 수 있음을 깨닫고 모두들 도연을 찾으러 뛰쳐나간다. 에필로그에서 명옥과 종섭은 부부가 되어 있고 도연도 아내와 같이 살고 있다. 조지아나는 미국에서 가정을 꾸렸다.
'탑 고시원'은 무대와 시간의 극적 활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극장용으로 적합한 이 작품은 답답하고 폐쇄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질식할 것 같은 여러 인생을 만화경처럼 펼쳐 보인다. 다운 스테이지의 공동공간은 그나마 이들이 사랑하고 위로하며 서로 소통하는 공간이다 현재와 미래를 오가는 시간 설정은 그 자체로 미스터리적인 분위기를 창출한다.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넘나들며 이들의 삶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이는 기이한 형태가 되지만 그래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 바로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10년쯤 지나 맛이 변질된 소주, 화석처럼 변해버린 케이크 등은 이들이 삶이 정체되어있을 경우에 귀착될 미래의 모습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한다. 작가는 귀납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현재의 문제를 통쾌하게도 연역적 인 방법으로 풀어버린다. 즉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살아보라고 막연히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10년 후의 행복한 미래를 먼저 보여준 후, 그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라고 독려하고 있다. 그들의 희망은 특히 가족과 관련되어 있다 명옥은 맞고 사는 엄마를 구출해야 하고, 조지아나는 버려진 아들을 되찾아야 하고, 도연은 헤어진 아내와 다시 만나야 한다. 에필로그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과 해체되었던 가족의 재결합을 통해 따뜻하게 희망의 메시지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