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평목 '출구 出口'

clint 2015. 10. 30. 08:26

 

 

 

 

 

 

극작가 박평목의 작품세계는 그 내용이나 형식이 특이하다. 우선 그의 작품을 희곡으로 만나면 쉽게 읽어지지 않는다. 전작 「누군들 광대가 아니랴!」를 대본으로 읽을 때 그런 어려움이 있었는데, 「出口」를 대본으로 읽으면서도 같은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니, 그의 극작이 천성적으로 극장주의에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해서 쓰여 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연장이나 공연이 매우 부족한 시기에 극작을 해온 그간의 방법에서 벗어나 공연장이나 공연이 풍부해진 이 시대의 현실에 적합한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대본이 연출과 연기 그리고 무대, 조명 등 지원 분야의 자리를 열어줌으로서 공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出口'의 무대는 일상의 사무실임에도 통상의 기능을 하기보다는 다른 용도, 즉 연극 연습실로 사용된다. 책상, 캐비넷, 파일박스, 서류, 컴퓨터, 전화기 등은 분명 현실적으로는 가구나 집기이고 연극에서는 대소도구임에도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세상의 무형적 사상 개념인 의심, 모함, 편 가르기, 불안 등의 역할을 하게 한다. 말이 떼지어 꼬리를 물고 일정한 궤적을 달리는데 그 힘찬 운동성과 한계적 궤적의 충돌로 많은 상징의 파편들을 내보인다. 모두가 단역, 조연, 주연의 복합역할을 하도록 구성된 그의 인물들은 영웅적 역할이나 사건을 체험하기보다 현실적 배우와 소시민으로 관객 앞에 알몸을 드러내고 내면을 스스로 폭로한다. 게임이라는 평이함서 공포를 느끼게 하고, 그 공포 속에서 신문을 당하듯 내부의 어둠을 토해낸다. 그 자백과 항변이 상황을 진전시키면서 연극이 발전해간다. 이런 것들이 다분히 번뜩이는 영상적 이미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어느 만큼은 추상효과를 나타낸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매우 충동적이다. 달콤한 옷을 입히지 않고 저돌적이다.
그의 희곡이 연극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극장주의적 공동 작업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증거로 「누군들 광대가 아니랴!」를 꼽을 수 있다.
「出口」가 연극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예감을 갖는 것은, 한국연극협회 극작분과위 원회에서 주관하는 〈창작희곡 개발프로그램>에서 이미 여러 차례 선발 과정을 거쳐왔고, 「극단 예군」의 연습과정에서 연출가 혁수와의 작업에서 작가가 대본의 극장주의 적 깊이를 더욱 심도 있게 완성시켰다는 확신 때문이다. 「극단 예군」과 「평화 기획」의 우리의 정서 찾기 작업이 연극의 형태 찾기와 함께 영원불멸의 진리인 인성 찾기에 뛰어난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
이 희곡은 박평목 작, 김혁수 연출, 민경호 기획으로 1995년 5월 31일부터 7월 30일까지 성좌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작가의 글 - 박평목
30년 전쯤 전의 일이다. 그 시절 독특한 편집방향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주간한국에서 백 명의 문화계 인사들에게 의뢰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설가 세 명을 선정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드러난 결과가 의외였다. 관록과 인기를 유지하던 많은 작가들을 제치고 1 위에 金承玉, 2위에 李浩哲, 3위에 徐基源으로 집계되었던 것이다. 그때 김승옥의 나이는 불과 스물여섯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젊은 작가는 곧 한 사춘기 소년의 우상이 되었다. 조용한 눈매에 양손을 마주잡고 앉아 있던 사진모습은 지금도 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짤막한 단편소설과 함께 실린 선정 소감문에는 꽤 의미 있는 말이 하나 있었다. 인간의 윤리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 나이가 “오십 쯤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예민한 작가가 감수성만으로 글쓰기에 한계를 느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후 한동안 그의 작품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간 것이 사실이다. 체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유미주의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나는 어느덧 오십이란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연극을 만나고, 칼 비트링거와 기노시다 준지와 사무엘 베케트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희곡 습작을 하면서 나는 이것이 김승옥의 일인칭 소설 류보다 훨씬 폭넓은 경험과 시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절망하기 시작했고 “오십”은 단 하나의 버팀목이 되었다.
주간한국 앙케트와 함께 머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 서기원은 그때 발표한 자전적 소설에서 그의 일제시대 중학생시절, 전체 조회시간에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열 지어 서있는 학생들의 모습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쓰러졌던 것으로 적고 있다. 전체주의와 조직, 이런 것들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었다. 20대초 그의 데뷔작이었던 暗射地園도 이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 KBS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부임을 반대하며 격렬한 쟁의를 벌였던 노조원들에게 잘 짜여진 조직력과 행정력으로 맞서 위기를 넘긴 일이 있다. 완숙한 경지의 그의 선택은 결국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그의 중후한 작품들을 보며 나는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삶의 난해함도 새삼 느끼고 있다.
자신과의 약속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가끔씩 자문한다. 나는 어떤가.
무수한 사람을 만나며 세상을 이해해 보려고 애써 온 삶이었지만 나는 아직 남다른 체험을 쌓지 못했고 통찰도 부족하기만 하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대 한 답도 모래알이 움켜진 손아귀를 빠져 나가듯 스러져 나갔다. 힘을 주면 줄수록 더욱 빠르게 때로는 쉽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저 보고 느낀 세계를 진솔하게 형상화하면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