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조열 '가면과 진실'

clint 2015. 10. 29. 09:48

이 작품은 남·북한과 미국의 요인이 등장하는 토론극이다.

 

 

작가의 글
문예진흥원 창작희곡 지원심사위원회는 또 다시 나를 지원 작가로 선정했는데, 아마도 나를 위로하려는 뜻도 포함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쓴 것이 '가면과 진실'이다. 당시는 불과 수년전의 7. 4남북공동성명 정신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하의 공포분위기가 극에 달해 있는데다가 북에서는 극렬한 대남공작노선을 채택하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남북의 압제권력은 각기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선전함으로써, 통일방안은 남북의 대립을 더욱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그 무렵에 마침 일련의 기록적 희곡을 읽게 되면서 북의 통일방안을 기록적 토론극 형식을 빌려 비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가면과 진실'에서 보인 시각은 1976년 당시에 특히 심했던 남북대립상황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고 그런 의미에서 미시적인 소위 냉전논리의 폐악이 여러 군데에서 드러나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지금도 같은 인식선상에 있다. 암튼 '가면과 진실' 은 창작희곡지원위원회에서 희곡이 아니라는 의견과 함께 다른 제재의 새 희곡을 쓰라는 종용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기록적 연극이나 토론극형식을 접해보지 않았거나 그런 형식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연극계 중진들이 지배적이었던 시기여서 예상한 바도 있는데다가 작품구성 자체도 허술한 데 가 많음을 스스로 자각 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당시로선 드문 토론극 형식을 도입시킨<가면과 진실>(1975)은 당시의 정치가들( 박정희 대통령과 이후락을 비롯해, 북한 외무상 허담, 딘 러스크 전 미 국무장관 등)이 등장해 각자가 구상하는 통일방안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다. ‘가면과 진실’은 기록주의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관심을 끌고 있지만 경직된 반공 이데올로기로 역사를 재조명했을 뿐, 희곡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의 육화가 갈등구조 속에 살아나 있지 않아서 관념성의 과잉이 작품의 연극성을 짓눌러 버리고 있다. 분단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과 극복 의지를 동일한 정신 구도로 삼고 있는 작품이지만, 작가가 연극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이데올로기 문제를 자연스럽게 용해시키고 융화시켜 표현했을 때 희곡적 성공을 얻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조열이 처음 시도한 기록 극에 해당하는<가면과 진실>은 청문회 방식의 극이다. 청문회란 관련 당사자들을 소환하여 질의와 응답의 과정을 통해 은폐되거나 왜곡되어진 진실에 도달하려는 모임이다. 이 경우, 질의자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공격적 질문을 하게 되고, 관련 당사자들 역시 자기들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공격적인 답변을 하게 되므로 일상적으로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청문회는 그 자체가 이미 극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청문회 방식을 따른<가면과 진실>은 무엇을 밝히고자 하는가. 그 기본적 입장은 ‘북의 통일방안에 대한 연극적 브리핑’이라는 부제가 잘 말해주고 있다. 북측의 ‘고려 연방공화국 통일방안’(조국통일 5대강령)의 본질을 연극으로 다루겠다는 것이다. ‘가면’이 북측 통일방안의 표면적인 것이라면, ‘진실’은 그 속에 숨겨진 것, 즉 무력을 통한 통일 추구라 하겠다.<가면과 진실>의 극 구조는 그러한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분단의 과정과 6·25전쟁을 다룬 1장이며, 두 번째는 북측의 통일방안을 항목별로 분석하고 있는 그 나머지이다. 1970년대에 북측의 통일방안을 일반 국민들이 제대로 알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측의 통일방안에 대한 정보는 오직 박정희 정권의 통제 속에서 제시된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1971년에 남북적십자 회담이 시작되었고, 1972년에는 7·4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국민들은 남과 북의 적대 관계가 금방 끝이 나고 통일을 위한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남측에서는 ‘평화통일외교 선언’ (6·23선언)을 내어 놓고 북측에서는 ‘고려 연방공화국 통일방안’(조국통일 5대 강령)을 내어 놓으면서 통일 논의는 끝을 알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가면과 진실>은 혼돈 속에 빠져버린 남북한 통일방안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연극적 응답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모든 자료를 동원해서 진실을 가리는 청문회 방식이기 때문에 1차 자료가 작품에 직접 인용될 수 있어서 관객들에게 작품의 진실성을 강조할 수가 있게 된다. 관객의 눈앞에 바로 제시되는 1차 자료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진실임을 증명하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6·25를 남쪽에서 일으켰다는 것은 전세계 인민들이 알고 있는 엄연한 사실”(321쪽)이라는 허담의 주장에 대해 토론자는 논쟁을 생략하고 증거물을 직접 제시한다. 미국방성에서 증거로 보관중인 공격명령서가 슬라이드를 통해 무대상에 바로 제시되기 때문에 북의 남침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게 된다. 기록극에서 1차 자료는 이처럼 막강한 효과를 낳는다.<가면과 진실>의 경우 통일방안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는 까닭에 객관성의 확보가 더 더욱 중요하다. 만일 북측의 통일방안만을 다루면서 지금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었다면 일부 관객으로부터 불공정 시비가 불거질 수도 있다. 박조열은 북측 통일방안을 항목별로 따져가면서, 그 결과를 남측 통일방안과 대비하는 방식을 택해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즉 북측 통일방안에 대해 일방적으로 시비를 거는 자리가 아니라, 비교를 통해 어느 쪽 방안이 좀 더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방법인가를 가리는 자리임을 관객에게 인식시키고자 한 것이다.
<가면과 진실>에서 허담은 특정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김일성정권의 속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남한에서 개최한 통일방안 토론회에 허담이 참석한다는 설정 자체가 불공정 시비를 불러올 수 있는데, 능수능란한 정략적 태도가 허담에게서 거세되어 있어서 그의 성격이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는 점이 문제이다. ‘평화를 앞세우면서도 끊임없이 침략을 준비하는 집단’의 이중성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허담은 ‘비합리성과 비현실성과 억지’가 강한 인물이지만 그러한 특성이 인물 자체에서 바로 드러나는 것은 기록극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알레고리적 연극에 집중하고 있던 박조열이 기록극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강력한 계몽·선전 효과를 지닌 기록극에 대한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박조열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북측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 사회에 늘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김일성정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려면 작가의 주장이 직접 전달되기에 용이한 기록극이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는 극작기법상 박조열은 기록극을 선택하기가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알레고리적 연극에서도 박조열은 관객의 반응을 극속에서 적극 활용해왔다. 기록극은 본질적으로 관객의 존재를 인정하고 진행되므로 박조열의 극작기법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어서 받아들이기가 용이했다고 하겠다.
박조열의 기록극은 분단문제를 추구해온 그의 작품세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펼칠 수 있는 극양식을 적극적으로 찾아갔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두 편의 기록극은 그 자체가 가진 한계로 인하여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었다. 박조열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여 엄정하게 김일성정권의 이중성을 폭로하였으나, 그러한 입장이 1970년대 박정희정권의 반공논리와 흡사한 까닭에 기록극의 객관성이 의심받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