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릴케의 희곡은 생소하다.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릴케가 젊은 시절 희곡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시실이 생소하며. 그런 이유로 이제껏 널리 읽히지 않았던 작품들이기에 생소하다. 학계에서 아직도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그 당시의 문학사적 조류와 조금은 어긋나면서도 젊은 시절 작가 자신의 시적 감수성과 정서적 열정이 희곡이라는 장르에 크게 어색하지 않게 유입되어 혼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생소하다. 하지만 생소한 것을 만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동시에 행운이기도하다. 릴케가 처음으로 쓴 완성된 희곡은 (가정의 수호신들) 잡지에 발표한 소극 형식의 경가극 극본인 〈세계의 몰락〉(1894)이다. 1895년에는 독백으로 구성 된 심리극인 〈무릴로>와 〈결혼 미뉴에트〉를 발표한다.

전반적으로 릴케 희곡의 주제는 여성의 문제와 그것에서 파생되는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갈등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젊은 시절 릴케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집필 당시의 자연주의적인 경향. 즉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피억압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그의 애정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그의 세 번째 작품이 〈첫서리〉(1895)이다. 이미 작가는 하층민들의 생활고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질러야 하는 매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897년 프라하 독일민중극장에서 초연된 〈첫서리〉에서 기르딩의 집안은 부채와 부정으로 파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어머니는 이 난국을 모면하고자, 연인 바우어와 함께 애정의 도피를 시도했으나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도덕적 비난. 가족들의 냉대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딸 에파를 결국 채권자인 메르첸에게 성적 노리개로 제공한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자살하고 뒤늦게 에파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바우어는 격분에 못 이겨 그녀를 교살하고 만다. 〈첫서리〉에서 악녀로 등장하는 어머니의 대사를 통해 상류사회 구성원들의 위선, 타락. 도덕적 사기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표출하고 있으며, 무대 지시 등도 자연주의 특유의 상세함과 사실성을 추구하고 있다.

극작가 릴케
릴케는 그의 젊은 시절에 희곡 장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작품들 외에도 몇 년간 더 연극에 대한 불행한 사랑을 품고 계속 희곡 작품을 집필했던 릴케가 결국 시를 중점적으로 쓰는 작가로 변신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가 세계를 경험하고자 할 때에 동원하는 원칙적인 시적 방식이 그 첫 번째 이유이고 자연주의와 상징주의 사이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결단력 부족이 두 번째 이유이다. 이미 더 이상 중심적 사조가 아닌 자연주의에 아직도 경도되어 있었던 그의 프라하 시절 작품들에 대한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릴케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희곡을 포기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언어와 관객의 문제였다. 체코에서 독일어로 글을 쓰던 그에게는 희곡이라는 장르가 출발점으로서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살아 있는 언어와 도착점으로 요구하는 민중이 결여되어 있었다. 즉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경우에 슐레지엔 사람들과 베를린 사람들이. 또 카를 추크마이어의 경우에 베를린과 라인란트 사람들이 했던 역할. 즉 글을 쓸 때 입을 볼 수 있는 민중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
다. 공연을 전제로 한 장르인 희곡을 쓰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조건인 셈이다. 그 때문에 그는 몇 번의 시도를 더 해본 후에 결국 시 장르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치밀함과 섬세한 감정 묘사가 돋보이는 릴케의 희곡들은 그 자체로서도 물론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후 릴케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빅토르 위고 작, 국민성 재구성 '쟈베르 & 쟈베르' (1) | 2016.05.28 |
|---|---|
| 사무엘 베케트 '말과 음악' (1) | 2016.05.27 |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전야제' (1) | 2016.05.24 |
| 베르나르 베르베르 '인간' (1) | 2016.05.22 |
| 루드밀라 라주모프스까야 '집으로' (1) | 2016.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