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버지니아 울프 원작 류숙렬 재구성 '자기만의 방'

clint 2016. 2. 19. 15:02

 

 

 

이 땅에 처음으로 페미니즘 연극이 선언되었다. 연극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되는 사례를 많이 보아온 우리는 페미니즘 연극이라면 여성운동가들의 천편일률적인 구호에 오염된, 남성혐오증의 반응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자기만의 방>은 강단에서 주의·주장을 펼치는 한 강연자의 뼈대 있는 논증을 무대구조로 환원시키는 새로운 장르 형성, 곧 강연극 형식의 모노드라마로서 이데올로기적인 강압보다 강의식 설득력이 근거를 갖는다. 우리로 하여금 이 연극에 호의를 갖게 하는 것은 여성연극의 선언을 여성우위를 논지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그늘에서 지독한 음지로 치부된 곳에 분석과 논증의 날을 대고 남성문화의 당연성을 가감시킴으로써 여성의 주체적 삶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인간주의적 발상이 돋보인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주체적 삶은 바로 남성의 주체적 삶과 표리관계에 있다. 지독한 그늘에 빛을 주기 위하여 남성문화를 뭉개 버리는 여성운동가의 주장이 아니라 여성문화를 북돋움으로써 음지를 다 같은 양지로 만들려는 연극적 시도는 인간주의 연극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여성연극 선언에 참여한 여성문화예술기획(대표 이혜경),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lf)의 동명 표제 강연집을 우리 식으로 재편성한 류숙렬의 번안, 각색, 그리고 일인극 모노드라마로 체현시킨 이영란, 성좌소극장에서 공연을 성사시킨 극단 띠오빼빼(대표 방영)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연출 김상렬의 남성 파워를 제외하면<자기만의 방>은 여성만으로 이루어진다. 굳이 연출마저 여성으로 단일화시키지 않은 점도 이 그룹의 자세가 유연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 표제 강연집은 72개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약간은 신경질적인 희대의 천재 강연록이 관념적이며 추상적이고 다소간 여성운동 성향의 이데올로기로 물들어 있으리라는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주의·주장으로서는 가능하겠지만 연극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을 공연물로 꾸며낸 번안, 각색은 뛰어나다.

 

 


우선 이 강연극은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남성문화의 산물인 춘향이와 심청이 그리고 현대의 경아와 애마부인 등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편견에 대항하는 논리는 날카롭다. 남성중심 사고방식에 의해 이지러진 여성상에 대한 책임 추궁은 마광수, 김용옥, 김지하에까지 미친다. 그것은 제1장이라면 2장은 버지니아 울프의 주장과 그녀의 여성운동가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여기에는 셰익스피어의 누이동생이라는 가상의 여성예술가가 상정된다. 여성이기 때문에 꽃피워 보지 못하고 사라져간 여성예술가들의 예술혼과 열기와 폭발력을 되살려 내려는 의도는 우리 역사 속의 황진이·사임당 등으로 사실성을 띠게 된다. 이러한 주의·주장과 고증과 비판은 이영란이라는 강연자의 단호하고 선명한 연기력에 의해 연극으로서보다 강연으로서 ‘연극화’된다. 극적 거점으로 무대 후면의 마네킹과 우측의 책상, 그리고 좌측의 앞머리의 기점을 잇는 행동반경의 삼각구도도 돋보인다. <자기만의 방>은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고 자기만의 공간을 가짐으로써 창조적 작업을 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한다. 공연 작품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신만의 시간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여성이기 때문에 가져야 할 소유가 아니라 창조적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전제조건이다. 이 강연극은 마지막 3장에서 많은 여성문제를 안고 있는 잘난 여성들에 대한 공세에 맞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양성성의 추구, 여성 고유 경험의 형상화를 강조함으로써 마무리를 짓는다. <자기만의 방>같은 모노드라마가 배우 한 사람의 연기를 과시하거나 탤런트를 보여주는 일인극으로 끝나지 않은 것은 인간주의적 평등사상의 연극적 표현이라는, 주제 저 너머의 또 다른 집단의 큰 뜻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류숙렬

서강대학교 독문과 졸업. 뉴욕 헌터컬리지 여성학 학부과정, 뉴욕 시립대대학원 여성학 석사 졸업. 페미니스트 잡지『이프 If』의 편집위원이자 문화일보 부장, 여성전문위원으로 일했으며, 한국신문윤리위원, 방송위원을 역임했다. 페미니즘 연극 「자기만의 방」 대본을 썼고, 『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엄마 없어서 슬펐니?』와 시집 『외로워서』를 펴냈다. 옮긴 책으로는 『버자이너 모놀로그』『힐러리 미스테리』(공역) 『여자를 우울하게 하는 것』 등이 있다. 현재 사단법인 문화미래 이프의 공동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