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버어나드 슬레이드 '이듬해 이맘때'

clint 2016. 2. 18. 10:45

 

 

 

 

 

이 작품은 전형적인 브로드웨이풍의 로맨틱 코메디물로 25년간에 걸쳐 1년에 한번씩 어느 호텔에서 은밀히 밀회를 즐기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관계가 기둥 줄거리를 이룬다.
1장 - 1951년 2월 어느 날 캘리포니아의 한 호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예요." 조지와 도리스는 서로에게 반해 하룻밤을 함께한다.
2장 - 5년 후. 해후 5주년을 자축하는 두 사람. "아무 걱정도 없이 얽매일 필요도 없이, 책임질 일도 없이 해마다 여기서 보내는 이 아름다운 주말에 대해서 고맙소. 도리스!"

3장 - 10년 후. "우린 연인이자 좋은 친구예요. 안그래요?" 만삭의 몸으로 조지를 만나러 온 도리스는 진통을 시작하고...
4장 5장 - 20년 후. "당신체온을 마음으로 느끼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예요." 남편이 집을 떠난 도리스는 조지에게 구혼하지만...
6장 - 25년 후. "24년이 지났는데 도대체 왜?" "난 해피엔딩을 사랑하니까요!"

 

 

 

민중극장 초연시 광고 카피 초추의 계절에 애잔한 휴머와 짙은 감동을 뿌려줄 이 한 편의 연극!!
이듬해 이맘때 버나드 슬레이드 작. 신정옥 역.
최치림 연출 출연 김애경 / 박봉서
1978. 10. 1 - 10(4시 / 7시 30분) 엘칸토 예술극장 극단...

 

- 15년 후. "내가 아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늦깎이 대학생 도리스와 참전했던 아들의 죽음을 맞은 조지의 만남.

 

 

 사랑도 잘하는 배우
- 민중극장의<이듬해 이맘때>제목이 퍽 정갈스러운<이듬해 이맘때>는 민중극장이 10월 1일부터 10일(1978)까지 엘칸토예술극장에서 공연했다가 15일까지 닷새를 더 늘려 공연한 작품이다. 제목 하나로 봐서는 순진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 같지만 그것은 이십오 년 동안에 걸친 남녀의 퇴폐적인 불륜의 이야기를 곱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연극의 재미는 부정과 불륜의 남녀관계를 어떻게 상큼한 에로티시즘으로 조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원작자 버나드 슬레이드(Bernard Slade)는 무대에 대해서는 꽤 알고 있는 대신에 극작술이 무엇인지는 몰라서 연기만으로도 무대를 때울 수 있다고 믿고 작품을 쓴 것 같다. 그래서 이십오 년에 걸친 긴 불륜관계를 오 년을 단위로 하여 한 장면씩 처리하여 마치 우등생의 작문처럼 짜 놓았다.
1951년 캘리포니아의 시골 여인숙에서 두 남녀 - 조지라는 회계사와 도리스라는 여자 - 가 처음으로 만나는데 조지는 업무 때문에 여행을 하고 있었고 도리스는 수도원을 방문하는 참이었다. 우연히 그렇게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엔 윤리의식이나 도덕관념을 빼 버리면 두 사람의 만남은 전혀 컴컴한 구석이 없이 미국식, 아니 브로드웨이식으로 장삿속이 차려질 만큼은 다듬어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약간 어색했겠지만 해마다 그맘때쯤이면 거짓말을 둘러대어 식구들을 속이고 집을 빠져 나와 추억의 여인숙에서 만나기를 거듭하는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도 꽤 사라질 터이다. 그래서 처음 만난 다음에 오 년이 지나서 다시 만나는 두 번째 장면에서는 좀 어색한 듯하다가 곧 다정한 부부처럼 허물이 없어졌다. 그렇게 꼬박꼬박 오 년씩 건너며 나가니까 구성은 단순한 대로 짜여졌지만, 극적인 전환이나 긴장은 그 한 장면 안에서나 만들어질까, 전체적으로 깊이 있는 갈등이나 대립은 아예 빠져 버렸다. 물론 갈등이나 대립이 이 연극의 핵심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면 이 연극이 보여주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히려 약간 감상적이면서 달콤한 에로티시즘이다. 그리고 거기에 양념으로 ‘웃음’을 쳤다.
작품세계가 심각한 철학을 담고 있지 않으니까 연출이 나아갈 길은 뻔하다. 재미있게 낄낄댈 수 있는 대목을 군데군데 끼워 넣고 물씬한 애욕이 넘치는 재담을 펼치면 관객은 그들이 낸 입장료만큼은 즐긴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셈을 해 보면 관객은 그들이 받을 만큼 서비스를 받은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쌍쌍이 들어온 대부분의 젊은 관객은 아직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알 만한 나이가 안 되어서 우당탕탕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것이 연극의 진짜 재미로 착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오 년마다 발산되는 에로티시즘의 빛깔이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연기자의 잘못인지 연출자의 잘못인지 알 수가 없다. 기껏해야 도리스를 임신시켜 놓고 그것을 성의 결실인 듯이 보여주자 그것을 에로티시즘의 정점으로 착각한 관객은 히히덕거렸다. 그것은 한국 연극 관객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모습이었다. 작가 슬레이드는 에로티시즘의 갖가지 빛깔을 보여줄 요량이었는데도 연출자는 그것을 흥행과 너무 밀착시켜 해석한 것 같다. 에로스의 빛깔이 기껏 만지고 껴안고 입맞추는 따위의 동작이나 지껄임만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묘한 공간을 연기로 채워야 했는데, 연기자로서의 조지 역의 박봉서는 도무지 빛을 내지 못했고 따라서 도리스 역의 김애경도 빛깔이 약해졌다.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려면 두 연기자는 더 여유가 있고 원숙해져야겠다. 격을 갖추고 죽이 맞아야 하는 연기의 대결에서 맡은 역에 걸맞은 에로스에 무르녹지 못한 김애경과 박봉서는 기껏 나이든 티를 내는 정도로 이십오 년 동안의 변신을 감당할 뿐이었다. 변신의 기교가 겨우 나이 들어가는 티를 내는 데에서 머문다면 그것은 분장술 덕분이지 별 게 아니다.
이 연극에서 연기자의 변신은 적어도 애욕의 변신까지 가야 했다. 나이에 알맞은 체험 세계의 상상이 없이 창조적인 연기는 나올 수가 없다. 연출자나 연기자에게 시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까닭은 무대에서는 그들이 비록 체험하지 못한 세계라 하더라도 상상력의 도움으로 그 세계를 그릴 수 있어야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우리 연극계의 사정으로는 그런 요구를 내거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김애경이나 박봉서는 분장술로 이십오 년의 나이 폭을 메우기는 했지만, 1951년에서 이십오 년이 지난 때의 중년의, 또는 늙은이의 에로티시즘은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다. 노경으로 들면서 그들은 한낮 늙음을 나타내는 인형 같은 도구가 되어 버렸다. 점잖은 부정과 불륜, 연출자는 이런 모순된 명제를 철저히 부숴야만 했다. 불륜에 무슨 점잖음이 있는가. 그것이 깨어지는 곳에 불륜과 에로티시즘의 구원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교의 가르침이 깊이 배어 있는 우리의 처지가 애욕의 표현을 상당히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 울부짖고 떠들고 아우성치는 연기들은 못하는 것이 없는데 가라앉은 애욕의 뜨겁고 미묘한 감촉을 묘사하는 꼴은 그렇게 촌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것은 뛰어난 연기자가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보면 관객은 언제나 밑지는 장사에 끌려 나오고 있는 셈이다. 입장료만큼 되돌려 주려면 일상생활에서 엮지 못하는 연기의 창조 곧 침묵 속의 울음이라거나 뜨겁게 닫혀진 사랑의 마음이라거나 우리의 감각에 상큼하게 와 닿는 에로스의 감미로움을 관객에게 던져 주어야 옳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는 뛰어난 연기자들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김애경의 여자다운 에로티시즘에 견주면 박봉서의 에로티시즘에는 전혀 예술의 맛과 향기가 없었다. 남자 연기자의 깊이 있는 에로티시즘은, 물론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연기자들에게 그런 멋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연극을 보러 가겠는가.
요즘 들어서 여자 연기자들이 분위기를 조성하는 솜씨가 좀 돋보이자 상대적으로 남자 연기자들의 깊은 멋이 더욱 아쉬워진다. 그것을 단순히 인기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표현하지는 말자. 폭 넓은 인간미를 풍기는 예술가, 그의 몸짓 하나 하나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미묘한 명암을 드러내 주고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멋을 부려 주는 이른바 예술가로서의 분위기를 갖춘 연기자들이 그리워진다. 그러면 이 불륜의 에로티시즘은 훨씬 순화될 수 있었을 것이며, 불륜의 의미는 연극예술을 통해서 또 다른 조명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십오 년 동안이나 남몰래 이어온 두 남녀의 애욕, 그것은 기성도덕관념으로서는 용서 받을 수 없는 패덕이다. 그러나 불륜의 관계는 이십오 년이 지난 오늘도 나돌고 있는 추문이지 청산된 과거는 아니다. 조지의 아내는 그런 남편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채 덮어 주고 죽어 버렸다. 도리스의 남편은 아내의 도움이 없으면 꿈쩍도 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이다. 아내가 죽었으니까 조지는 떳떳하게 도리스와 혼인할 수도 있다. 도리스도 그를 뜨겁게 닳아 오르게 해주는 조지와 이제는 떳떳하게 함께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불륜의 남녀는 그렇게 몰염치하지는 않았다. 도리스는 남편 곁에 있을 것이고 조지는 또 내년 이맘때쯤이면 그 작은 여인숙에서 도리스와 다시 애욕의 하룻밤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계가 어떤 결말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이 작품에서는 별 뜻이 없다. 에로티시즘을 어떻게 미화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륜이고 한낱 변모된 에로티시즘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런 연극을 용서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이미 너무나 굳어버린 기성가치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에 예술의 힘으로나마 굳어 버린 관념을 깨뜨려 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술, 연극예술이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불륜을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는<이듬해 이맘때>를 가지고 도덕군자처럼 성의 타락을 탄식할 것도 아니고 또한 에로티시즘의 무르녹은 향취를 ‘연극으로’ 끌어내지 못했다고 탓한다는 것도 지나친 일일지 모른다. 이미 작품은 ‘거기 있음으로써’ 불륜이라는 기성관념을 되받아치는 예술의 도전은 일단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예술을 이루는 연기자들은 예술을 만들 때에 상상력을 더 발휘해야겠다. 그런 점에서 김애경은 연기의 감각이 뛰어난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