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들 보다 컴퓨터와 전화에 더 친숙한 7명의 아주 바쁜 뉴요커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화로 온갖 이야기를 나누는 여섯 남녀.그들은 실연이나,출산 등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서로 주고 받지만, 결코 만나지는 않습니다. 말미에 어렵게 만날 약속을 정하지만,대부분 나타나지 않고, 장소에 나타난 두 사람조차 서로 외면하고 스쳐지나간다는.....
뉴욕, 마틴은 자신이 기부한 정자은행의 유전자로 임신한 데니스와 통화를 한다. 아버지가 된다는 기대와 전화를 끊을 줄 모르는 데니스와의 수차례에 걸친 통화로 마틴은 새로운 활력소를 찾게 된다. 데니스는 마틴에게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 옆에 있어 줄 것을 부탁한다.
데니스가 걱정된 마틴은 전화기를 손에서 절대 떼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어느날 바바라가 린다와 전화를 하며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목숨을 잃자, 모든 친구들이 이 소식을 전화로 전해듣지만 정작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 프랭크는 친구들을 연말파티에 초대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친구들은 오지 않고, 프랭크도 친구들을 직접 만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제 마틴을 둘러싼 모든 친구들은 회의용 전화 중계로 데니스의 출산과정을 함께 하는데, 이들은 서로의 모든 일상을 지켜보지만 파티, 미팅, 장례식, 연말파티 등 만날 수 있는 기회에서는 정작 몸을 사린다.

「데니스는 통화중」의 진짜 주인공들은 사람이 아니라 전화 팩스 핸드폰 노트북컴퓨터 등 새로운 세상을 예감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산물들이다. 그런데 뉴욕 출신의 할 셀웬의 이 작품속에서만큼은, 이러한 기계로 매개된 인간들의 관계는 결코 풍요롭지 못하다. 온갖 전파와 전자신호로 매개된 백인 화이트컬러 노동자들의 비극적 인간관계를 희극적으로 되짚어낸 이 영화 속에서 테크놀로지는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린 과학의 성과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파편화시키는 거대한 장애물일 뿐이다. 7명의 젊은 전문직 남녀가 번갈아 등장하고 쉴사이 없이 떠들어대건만, 이곳에는 키스신도 액션도 없으며 심지어 주인공들은 한번도 한자리에 모이지조차 않는다.
프랭크는 사귀던 애인 게일과 5년째 만나지 않은 상태지만, 그들은 그저 「잠시 멀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자위한다. 그도 그럴 것이, 노트북컴퓨터를 앞에 둔 채 재택근무에 열중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이들에게 공간의 분리는 사소한 장애에 불과하다.
프랭크는 자신의 친구 제리를 게일의 친구 바버라와 맺어주려 노력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인연을 맺은 제리와 바버라는 전화를 매개로 사랑을 「통화」하는데 열중한다. 그 와중에 임신 8개월의 데니스가 우격다짐으로 뒤얽힌 관계의 한복판을 비집고 들어온다. 데니스는 제리의 친구 마틴이 정자은행에 기증한 정자의 수혜자로 마틴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녀는 아무런 애정도 개입될 여지가 없는 마틴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갑작스러운 게일의 죽음과 연이은 데니스의 출산은 모든이들의 관계를 혼돈으로 이끈다.
작품을 끌고 가는 힘은 전화상으로 벌어지는 온갖 해프닝들의 연쇄, 그리고 그러한 가상의 만남이 어느 정도까지 일상의 직접적인 만남을 대체할 수 있는가를 끝없이 실험하는 데 있다. 그리고, 실험은 언제나 동일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도대체 언제나 이들은 만날까? 아니 만나기는 할까?』 글쎄, 만나기는 하지만 모두는 아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 많지 않게 마련이고, 오로지 두 쌍의 연인만이 만남의 가능성을 지니지만, 용기있는 자만이 애정을 쟁취한다. 할 셀웬이 말하고 싶은 것은 첫번째 장면에서 이미 설명이 되고도 남는 것이며, 마지막 파티에서 결론은 보다 명확해진다. 모든 사람이 파티에 초대되지만, 이번에는 주최자(!)가 초대를 거부한다. 오히려, 아무런 인연이 없어도 상관없는 데니스와 마틴만이 모든 장애물을 쉽게 건너뛰며 순조롭게 관계의 형성에 몰입한다.
그런 면에서 「데니스는 통화중」에서 발견되는 현대인들의 생을 가늠하는 좌우명은 바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만나고는 싶지만, 일에 치여서…』
누구나 그리움을 표현하지만 모두들 만남에 대한 두려움 속에 고독을 씹어만 가고, 테크놀로지의 허위의식을 녹여버리는 데니스의 천방지축 사랑찾기를 통해서만 희망은 제시된다. 하지만 희망의 주소를 찾는 대가로 직접적인 만남을 차차 상실해가는 사람들의 고립무원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80년대를 주름잡던 우디 알렌의 작품들에 비견되기에는 힘이 다소 부치는 것이 안타깝지만, 미국 현대, 젊은이 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쾌한 풍자와 리듬감이 신선한 경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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