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 73

서윤미 재창작 '모던(Modern)'

“난 이제 무겁지 않아. 난 내 발목을 잘라낼 거야. 발목을 잘라내고 먼지처럼 사라질 거야. 저길 봐. 영원히 부유하는 저 먼지들. 먼지들은 이유가 있는 춤을 추지 않아.” 모든 관습과 틀, 경계로부터의 해방을 꿈꿨던 모던 발레의 창시자 바슬라프 니진스키. 그는 동성애자인 예술감독 디아길레프, 무용수인 아내 로몰라를 만나며 운명적인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운명적 인연들이 만들어낸 삶의 갈등, 그리고 뛰어난 기량 속 숨겨졌던 내적 트라우마.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강박감 등은 그를 정신병 속에 가두고야 만다. 갑작스런 은퇴 이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이른바 ‘깨어있는 코마 상태’로 지낸 니진스키. 그는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어딘가에 갇혀 기나긴 미로를 홀로 걷는..

외국희곡 2024.01.05

한기철 '동행'

198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인 이 작품은 오랜 세월 내 책꽂이에 있다가 이번에 다시 읽고 여기에 올린다. 한 농부의 보리밭에 큰 뱀이 살고 있고 그 뱀을 잡으려 땅꾼을 불렀다. 농부의 얘기론 예전에도 이 뱀을 잡으려 한 땅꾼을 불러 하루 종일 길목을 지켜 뱀을 만났는데 뱀과 그 땅꾼 둘의 눈싸움 끝에 뱀이 조용히 물러갔다는 얘기이고… 땅꾼은 뱀이 새끼를 뱄기에 살려줬다는 얘기도 해준다. 여기에 나비를 잡으러 온 사내가 등장하고 농부의 아들이 와서는 마을에 순경이 아버지를 찾는다고 한다. 아들은 주워들은 정보라며 총기를 들고 탈영한 병사 때문이라고 한다. 부자(父子)가 가고 땅꾼과 사내가 남아, 나비 이야기와 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둘은 서로 뭔가 감추고 있는 것을 느낀다. 사내가 말을..

한국희곡 2024.01.05

모토야 유키코 '난폭과 대기'

무대는 야마네 히데노리와 오가와 나나세가 사는 집이다. 6년 동안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는 히데노리를 위해, 나나세는 개그를 연구하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히데노리는 가끔 마라톤을 한다며 외출을 하는데, 실은 몰래 천장 위 다락으로 올라가 나나세를 훔쳐보고 있다. 나나세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다. 어느 날 히데노리의 직장 후배인 반조가 집을 찾아오고, 매 순간 남의 얼굴을 살피는 나나세의 독특한 행동은 반조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나세의 미모에 관심이 생긴 반조는, 어떻게든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 애인인 아즈사를 소개해 히데노리와 나나세의 비밀을 파헤치려 한다. 알고 보니 그 비밀은 12년 전 한 사건에 의한 것이었다. 사이가 좋았던 히데노리 가족과 나나세 가족은 함께 여행을 갔는데, ..

외국희곡 2024.01.05

김윤식 '띨뿌리'

1988년, 매향리 일대는 미군의 폭격 훈련으로 굉음이 끊이질 않는다. 매향리 주민인 춘매와 춘매의 가족은 월북자 연좌제로 얽혀 있어 혹여나 가족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춘매의 집 앞에 오발탄이 떨어지지만 춘매의 가족은 포탄의 흔적이 남은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날 이후, 막내 선오는 폭격 소리만 들리면 죽은 아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차남 칠현은 매향리 폭격장 반대운동을 시작한다. 선오는 가족들이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것에 분노해 집을 나가고, 가족들이 그를 찾던 중 정현의 아내 미진이 포격에 휩쓸려 사망한다. 안기부에서는 정현에게 연좌제 폐지와 칠현의 시위 참가를 빌미로 아내 미진이 죽은 사건을 덮고 폭격장의 관리자로 일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희곡 2024.01.04

최민지 '슬라바 무곡'

스모그가 심각한 어느 해외, 요양원. 원장의 아버지 얼은 무료한 생활에 활력을 주기 위해 체조 대신 블루스를 춘다거나 요양원 노인들과 우스꽝스러운 별칭을 정해 부르기도 한다. 얼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는 죽음 직전까지 음악에 한평생을 바친 첼리스트의 삶에 반한다. 얼은 로스트로포비치를 연기하며 주위 사람들을 그의 연극에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소식하던 얼은 갑자기 대식가가 되기도 하고 친구 조지를 로스트로포비치의 친구 벤자민 브리튼으로 부른다. 얼은 요양원 직원 멜리사에게 대뜸 자신의 첼로를 가져오라 소리치기도 한다. 조지는 얼의 이상한 행동을 못마땅해 한다. 조지는 노망난 늙은이의 장난이 어디까지 가냐며 두고 보기로 한다. 그러다 조지는 얼의 정신이상을 눈치채고는 얼의 마음을 돌리려..

한국희곡 2024.01.04

소윤정 '배이비'

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심사평 - 최진아 극작가(극단 놀땅 대표)·장우재 연출가(대진대 연기예술학과 교수) 올해는 최근 현실 문제를 다루는 경향이 약해졌다. 대신 그 안에서는 소재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있었다. 인정투쟁, 고령화, 극단적 범죄, 가짜뉴스에 대한 우려 등은 여전했고 물질, 사물, 꿀벌, AI봇, 식물, 냄새 등 포스트 휴머니즘의 영향으로 보이는 것과 아예 어떤 범주로도 묶이지 않으려는 듯 땅에서 구름을 찾거나 시간을 부정하는 시도 또한 보였다. 이런 경향에 대해 사회에 관한 관심이 약해진 것일까, 고민해 보았다. 어쩌면 문명과 인류에 대한 불신이 배어 있는 것도 같았다. 또 무대에서 구현하기 힘든 희곡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희곡의 메타포는 타 문학과 영상 매체의 그것과는 약..

한국희곡 2024.01.03

송천영 '벼랑 위의 오리엔테이션'

서울신문 2024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심사평 - 정진새 · 오세혁 연극연출가 겸 극작가 ‘2024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는 75편의 작품이 투고된 가운데 대부분의 작품이 고른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 줬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인 돌봄, 인공지능(AI), 재난, 자연, 포스트휴머니즘을 다룬 이야기들을 행복한 마음으로 읽어 나갔다. 심사위원은 일곱 작품을 본심에서 논의했다. ‘벼랑 위의 오리엔테이션’, ‘마법과 오컬트가 있는 연극’, ‘가면극’, ‘들여다보지 마시오’, ‘치매완전정복’, ‘어스 밖 어스’, ‘사랑이라는 그 이름을 붙이지도 말아요’가 선정됐다. 당장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작품들이었다. 심사위원은 곧바로 무대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연극성과 무대와 관객이 새로운 질문을 함께 ..

한국희곡 2024.01.02

송민아 '묘전: 무덤전쟁'

2024 강원일보 신년특집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심사평 - 진남수·김혁수 평론가 ‘희곡은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희곡의 무대화, 즉 연극적 특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응모작 중 많은 희곡이 한 편의 읽히기 위한 문학 또는 단순한 대화를 통한 줄거리의 전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총 69편의 희곡을 심의한 결과, ‘거기서 거기’ ‘1인용 바다’ ‘곶자왈: 기적의 숲’ ‘창문 열면 벽’ ‘나를 잊지 말아요’ ‘꽃이 피다’ ‘무덤 전쟁’ 등이 최종 논의의 대상으로 남았다. 이 희곡들은 나름대로 무대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또한 각각 뚜렷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다만 공통적으로 희곡으로서 갖추어야 할 극적 짜임새가 부족했으며 결말의 미흡함도 지적하지 않을 ..

한국희곡 2024.01.02

김물 '허기'

2024 매일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심사평 - 조광화, 최현묵 극작가 신춘문예는 항상 새롭다.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 그리고 새로운 시선과 철학을 가지고 삶을 해석하는 힘. 우리가 기대하는 신춘문예 당선자와 당선작에 대한 기대다. 그러나 그 기대가 충족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또 그 가운데 각종 디지털 매체의 영상물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치의 '새로움'이란 더욱 어렵다. 202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희곡·시나리오 응모작들을 총괄해 느낀 점은 인물이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존재하지 않고, 다소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상황 설정 역시 그랬다. 동시에 희곡으로서 두 가지 특성, 문학성과 연극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작품을 만나기 어려웠다. 그럴 경우 ..

한국희곡 2024.01.02

윤성민 '위대한 무사고'

2024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심사평 - 심사위원 이성열 장성희(대표 집필) 희곡 부문 응모작은 모두 101편이었다. 단막극의 길이나 시·공간 제한 등 기본 조건을 넘어서는 작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대화와 이미지를 다루는 문학적 훈련, 동시대적 주제와 이를 진지하게 다루는 작가 의식, 연극이 담아낼 수 있는 행동 서사 등을 찾자는 시선으로 응모작들을 읽었다. 일단 대화를 쓸 줄 아는 작품이 많지 않았다. 대화를 시늉한 독백에 그치거나 상황만을 그릴 뿐 진전 없는 구조가 많았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 타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작품은 매우 적었다. 설명적인 대사로 채우거나 인물 각자의 혼잣말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 다수였다. 최종까지 거론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지구 반대편에서 스쿼트를..

한국희곡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