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장 아이링 '홍 장미 백 장미'

clint 2025. 3. 21. 13:10

 

 

 

< 장미 백 장미> 원작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퉁전바오는 영국유학을 한 엘리트로 상하이에 있는 외국계 회사의 고급 엔지니어다. 

사업가 친구 왕스홍의 아파트에 들렀다가 그의 아내 왕자오루이와 사랑에 빠진다. 

이 성숙한 몸에 소녀적 감성을 지닌 정열적이고 사랑스런 여인과 사랑을 나누지만, 

그녀가 남편과 이혼하겠다는 말에 깜짝 놀라 그녀와 헤어지고 모친의 권유로

참한 규수 멍옌리와 결혼한다. 그러나 무뚝뚝한 아내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점점

가정에서 멀어진다. 어느 날 전차에서 정숙한 어머니가 되어 있는 자오루이를 만나

혼자 후회막급! 한편 아내는 치파오를 맞추느라 드나들던 재봉사와 외도한다. 

얻지 못한 것을 동경하는 인간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장 아이링은 이렇게 말한다.

아마 모든 남자들에겐 이런 두 여인, 적어도 두 여인이 있을 거다. 

붉은 장미를 취하면, 붉은 장미는 시간이 흐르는 대로 벽에 묻은 모기 핏자국처럼

퇴색되어 버리는 반면, 흰 장미는 창가에 비춰 드는 밝은 달빛 같아 보인다. 

흰 장미를 취하면 마치 옷에 눌러 붙은 밥풀처럼 퇴색되어 버리는 반면, 

붉은 장미는 마음 판에 찍힌 붉은 연지처럼 늘 아른거리지" 

장 아이링은 객관적으로 관찰하듯 서술하고 있지만, 그 안에 민감하게 미움의

상처들을 담아낸다.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사적인 부분을 공개적으로

다룸으로써 주인공의 심리적 불안감이 강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10 10월 아르코예술극장 극장에서 중국 국가화극원 상임연출가 티엔친신의 무대로 국내 공연한 작품이다. 서울에서 개최된 시어터 올림픽스 참가작이었다. 장 아이링의 소설을 뤄다쥔이 각색하고 티엔친신이 정리 및 연출한 스타 버전(明星版) <붉은 장미 흰 장미>를 티엔친신과 저우허생이 재각색하여 유행 버전 <붉은 장미 흰 장미>로 재탄생시킨 작품이었다. 원작소설의 작가 장 아이링(1920-1995)은 이안 감독의 유명한 영화 <·>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경성지련>, <반생연>, <해상화> 등이 영화화되었고, <경성지련><반생연>, <금쇄기> 등은 드라마와 연극으로 제작 공연된 바 있다. 중국, 대만, 홍콩을 불문하고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장 아이링은 이홍장의 외증손녀로 명문가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나 가정적으로는 불우했다. 홍콩에서 대학을 다닌 후 1942년 문단에 데뷔했다. 사랑에 실패한 후 시니컬한 시각으로 당시 사회와 인간 군상들을 비판하였다. 1947년까지 5년간 많은 화제작을 쏟아내며 섬세한 감성과 독특한 문체로 인기를 끌었다. 그 후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다가 개혁개방 이후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시장 경제로 치닫는 근자의 중국에서 장 아이링이 이렇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녀가 자본주의 사회의 지극히 부르주아적 감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장 아이링 소설에서는 주인공 퉁전바오를 비롯한 인물들의 내면 심리가 단선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대로 서술되는데 비해, 티엔친신의 무대에선 붉은 장미와 흰 장미의 대조와 사건 진행의 시간적 착종을 기본 구조로 하여 재구성되었다 아내의 외도로부터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홍백 장미의 두 공간과 현재와 과거의 사건을 교차적으로 펼친다. 허위와 진실의 대조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대조와 대비를 운용하는 대조의 미학은 장 아이링 소설의 기본특성이기도 한데, 티엔친신은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갈등하는 내적 자아를 두 명의 배우가 나누어 맡아 연기하도록 한 내면 심리의 대조와 함께, 가운데 복도를 두고 좌우양쪽 아파트에 붉은 장미 흰 장미 두 여인을 각기 배치하여 대비시켰다. 근대적 욕망의 심적 공간으로 장 아이링 소설에서도 중요한 아파트의 이미지를 무대 위에 구현하며 티엔친신은 이를 남자의 심장에 비유했다. 좌심방과 우심방. 아파트는 자오루이의 자유분방한 삶, 전바오의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 상징된다. 양쪽 아파트 사이의 유리 복도는 전바오가 욕망의 추구와 이성적 판단이 교차하며 방황하고 주저하는 곳이자, 조바이링 소설처럼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개적인 것으로 관객에게 내보이는 장치이다. 거기에 매력적인 재즈 음악과 화려한 자오루이의 의상이 소주 평탄과 전통 치파오의 멍옌리와 대조를 이루며 희극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전바오의 회상 방식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며, 전바오가 좌우 두 공간을 오가며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교차되는 대조와 착종을 통해 허실을 교체하거나 연결시키며 스토리의 긴박감과 연극성을 증대시켰다. 간결하고도 상징적인 무대에 다소 과장된 신체 연기는 강화된 시각 이미지를 형성하였으며, 그 저변에 전통극의 리듬감과 상징성이 잘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매력적인 무대였다. 특히 인물 내면의 분열을 각기 두 배우가 연기토록 함으로써, 인물성격의 이중적 자아의 대비와 심층심리의 공개를 중요한 연극적 장치로 삼았다. 심리적 불안과 갈등을 관객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더욱 강력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기제로 이를 활용한 것이다. 한 인물을 두 배우가 연기하는 방식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기제로 역할하는데, 이 방법은 티엔친신이 한국판 <조씨고아>를 연출하며 이미 실험한 바 있다. 이렇게 내적 갈등을 공개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무대 위에는 저절로 연극적 장력이 형성될 뿐 아니라, 관객들은 인간의 양면을 엿보고 또 인물들이 다투고 타협하는 과정까지 보면서 관극의 즐거움이 배가되게 된다. 1940년대 상하이의 모던 여성 장 아이링의 다소 음울한 분위기에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를 덧입힘으로써 경쾌한 풍자와 희화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티엔친신과 저우허양이 재각색한 이 버전에서는 스타버전과 마찬가지로 붉은 장미와 흰 장미의 대조와 시간적 착종을 기본 구조로 한다. 인물의 분해는, 퉁전바오만 두 배우가 나누어서 이성적이고 책임감 강한 전바오와 감성적이고 욕망을 따르는 전바오를 연기한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21세기 중국 대도시 상황을 반영하여 퉁전바오가 여성으로 바뀌었고, 장 아이링 시기의 아파트와는 달리 인터넷 환경과 비행기 캐빈을 배경으로 삼았다. 붉은 장미는 유학 후 아내 왕스홍 회사의 중국본부대표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세련된 남자 동창 왕제루이로, 흰 장미는 같은 회사 영업 사원이면서 인터넷 게임에 빠져 사는 남편 멍옌리로 설정된다. 왕계루이의 아내 왕스흥은 광동 출신의 미국 화된 여성이고, 멍옌리의 정부는 90년대 출생한 N세대 게임 친구다. 장 아이링 때보다 더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화이트칼라 여성이 많아진 21세기 중국의 티엔친신에게는 여성 전바오의 내면이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다.

 

 

 

연극은 멍옌리가 정리해고 당하는 데서 시작된다. 더 확대된 시야로 게임중독, 정리해고, 신종 플루 등 21세기에 인류가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다룬다. 현실에서 벽에 부딪친 멍옌리가 인터넷 속 게임친구 차이펑을 현실로 끌어내어 집으로 불러들이고 이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퉁전바오가 왕제루이를 찾으며 일탈이 일어난다. 차이펑은 원작의 재봉사 역인데 재봉의 중국음이다. 그러나 티엔은 이들의 일탈을 보듬어 모두 안온한 가정의 가치로 귀속시켰다. 심지어 성장 과정에서 부성의 결핍을 경험한 게임 족 차이펑조차 자유분방하기는 하나 단순히 나쁜 제3자는 아니며, 오히려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젊은이로 그려낸다. 현대적 인간 소외환경 속에서, 오히려 일탈을 풍자하거나 조소하기보다 따뜻하게 감싸는 회복으로 이끈다. 서사의 방식도 현대의 멀티미디어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매체 방식의 서술이 이루어진다.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관객에게 매우 익숙한 리와인딩, 즉 되감기와 옵션 설정의 방법으로 사건을 구성하고, 음악과 멀티미디어 등 현대 젊은이들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을 활용하여 동시대 관객과의 소통에 초점을 맞추었다. 퉁전바오의 일탈 과정에서 다양한 옵션 설정 역시 다양한 매체 경험을 반영한 놀이의 한 방식이다. 그러나 장 아이링과는 거리가 생겼다. 수없이 장 아이링을 인용하고, 그녀의 언어를 빌려왔지만, 티엔친신은 이미 장아이링과 자신의 소리를 구분하고 있다. 장아이링이 제공하는 상하이의 향수와 중국전통 미감이 거세되고 초국적의 현재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티엔친신의 의도가 분명해진다. 전통과 사회의 시공의 무게를 벗어나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21세기 관객들이 호응하는 이유이다. 유명 작가 장아이링의 소설을 무대극 버전으로 다시 당대 유행버전으로 재창작하면서, 원작의 독특한 감성을 잘 살리면서도 자신의 독창성을 십분 발휘한 티엔친신의 연출 작업은 풍부한 중국문학 텍스트의 다양한 2차 창작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현대극의 다양성과 개방성 추구의 한 상징으로 평가될 만하다.

 

장 아이링 ( 張愛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