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지금 강소성 남경시) 사람 허견은 이왕에게 간언을 했다가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 변량(하남성 개봉시)으로
도주해서 양원붕에서 "남채화'라는 예명으로 연극 공연을 생업으로 삼는다.
이때 신선 한종리가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남채화가 신선이 될
자질을 가진 것을 발견하고 그를 출가시키려 하지만 세속 생활에 미련을 둔
남채화는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남채화의 생일에 다시 나타난 한종리는 잔치 자리에서 거듭 출가를 권하지만
그래도 듣지 않자 막역한 사이이던 여동빈에게 현지의 수령으로 변신하게
한 뒤에 남채화에게 술자리 수청을 들게 한다. 관청의 수청 의무를 거부하면
엄한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남채화가 하는 수 없이 관기로 향하지만
여동빈은 시간을 지체했다는 핑계로 그에게 곤장 10대를 질 것을 명령하고,
때맞춰 나타난 한종리가 출가를 조건으로 남채화를 구해 낸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어느 날, 한종리를 따라 출가했던 남채화는
길을 가던 중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답답가>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우연히
웬 유랑극단을 마주친다. 거기서 아내 희천금과 사촌동생들을 발견하고 왕년
극단 식구들도 마주친 이들이 환속해 다시 극단을 이끌어줄 것을 종용한다.
그 요청을 뿌리치지 못한 남채화가 옛 추억을 더듬으며 오랜만에 무대에
서려고 휘장을 젖히다가 그 안에 앉아 있던 한종리와 여동빈의 호된 꾸지람에
깨달음을 얻고 결국 그들을 따라 승천해 신선이 된다.
원대에 지어진 잡극 희곡들 중에는 종리권, 여동빈 등 신선들이 속세로 내려와 평범한 사람을 계도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여 신선의 경지로 이끄는 내용의 작품들이 많이 지어졌다. 중국 연극사에서는 이같은 유형의 작품들을 '신선도화극'' 또는 '도탈희'로 부른다. <남채화>는 정식 제목이 <인아동도소가가 노신선수고가, 여동빈점화영륜객, 한총리도탈남채화>이며, 일반적으로 맨 마지막 구절인 <한종리도탈남채화>로 줄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남채화 이야기와 희곡의 전파 과정
여기에 소개한 원대 잡극 <남채화>가 원대 어느 시점에 지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남채화의 행적은 남당의 심분이 지은 <속선전>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속선전>은 한대의 학자 유향의 《열선전》과 동진의 학자 갈홍의 <신선전>의 체계를 모방한 책으로, 심분 당시에 민간에 전해지던 도인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남채화가 불렀다는 <답답가>는 당대에 지어진 것으로, 그 작자로는 허견 또는 진도라는 주장이 있다. 이 희곡에서 남채화를 허견과 같은 인물로 본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 허견이 잡극 배우고 나중에 여덟 '신선'의 하나가 되었다는 설정은 온대 잡극에 이르러 허구적인 요소의 하나로서 새로 추가된 것이다. 그의 행적은 부송대 소설집인 <태평광기>) 및 원대 조도일의 <역세진신체도동감(茶世神體道通鑒)>에서 허구적인 내용들이 추가되면서 분량도 많이 늘어났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이 작품은 내용 성격상 '신선도화극'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 줄거리 자체는 도를 닦고 신선이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데 주안점이 있는 통상적인 신선 도화극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줄거리가 대부분 남재화(허견)을 중심으로 한 원대 잡극 배우들의 일상과 극단의 구성. 금기사항 전문용어, 극장의 구조와 배치, 당시에 유행한 공연 레퍼토리들을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할애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대의 극장과 유랑극단의 잡극공연 상황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어서 원대잡극. 나아가 중국의 연극사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줄거리상 일상 도시 생활의 면면에 대한 묘사가 중심인 반면, 통상적인 신선 도화극의 선교적인 내용은 분량 면에서 비중이 상당히 낮은 셈이다. 이 희곡은 줄거리만 연극과 긴밀한데 그치지 않고 극 언어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어투와 표현인 데다 극적구성 역시 상당히 치밀해서 그로부터 700년이 흐른 지금 무대에 올리더라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정도다. 그래서 중국 희곡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서 많은 희곡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원대 잡극에 대하여
원대 잡극 공연의 틀
원대에 유행한 연극인 '잡극이 어떻게 공연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시의 극단과 극장에 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연출 상황에 대한 자료는 현재까지 그다지 만족스러운 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사당에 그려진 벽화나 조각, 나아가 각종 문헌들에 브이는 부분적인 언급들을 통해 그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극단
원대의 극단은 이윤 추구, 즉 영리성 여부에 따라 상업성 극단과 비상업성 극단으로 구분된다. 비상업성 극단으로 대표적인 경우로 황실 극단과 농촌의 임시 극단을 들 수 있다. 황실 극단의 경우, 궁중의 저속 음악 기관인 '교방사'에 소속된 '관기' 등 일컫고 배우들이 각종 궁중 연희가 베풀어질 때마다 음악이나 연극을 공연했는데, 고정된 수입이 있고 생활 조건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배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임시 극단인 '사화'는 우리나라 농악대처럼, 마을에 경사나 동제가 있거나 명절이 되면 농민들이 그 여가에 분장을 하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무용이나 연극을 공연했다. 그러나 그 구성원 자체가 직업적인 배우도 아닌데 다가 공연 역시 한정된 기간에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문성이나 예술성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이 희곡에 등장하는 허견(남재화)의 극단 패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던 상업성 극단은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결속되어 있으면서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배우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배우가 부족할 때는 악사나 기타 스태프가 임시로 배 역을 할당받아 단역으로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상업성 극단 대부분은 조선 시대의 '남사당'처럼 주로 소도시나 농촌을 전전 하면서 연극을 공연해 이윤을 창출하는 '노기'라는 소규모 유랑극단이었다.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유랑극단은 이름이 없거나 은퇴한 고령 배우들이 주된 구성원이었고 언제든지 공연이 가능한 레퍼토리 자체도 상당히 한정되어 있어서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대 상공업의 발전과 도시의 발달로 시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이와 비례해 여가 활동의 요구가 커지면서 이 같은 영세한 유랑극단이라도 유명한 배우나 극작가들을 초빙하고 고정 레퍼토리를 확보하기만 하면 흥행에 성공을 거두고 대규모 극단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이런 대규모 극단들은 당시 원나라의 수도이던 대도(大, 지금의 북경시)나 평양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 항주(杭州, 지금의 절강성 항주시) 등, 안정적인 관중과 수입이 보장된 대도시에서 극작가들의 이익 집단인 '서희(書會)'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지 관청의 감독하에 고정된 극장 시설인 '구란'에 입주해 활발한 공연 활동을 전개했다. 규모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상업성 극 단들은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이윤 창출이 공연의 1차 목적이었다. 그럼에도 현지 관점에서 거행하는 행사가 있으면 언제든 '관신'이라는 명목의 수청을 들어야 했으며, 허견의 경우처럼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엄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극장
난간들이 복잡한 문양처럼 극장을 둘러싸면서 연결되었다고 해서 '구란'으로 불리게 된 원대의 극장은 '와사(瓦舍)'라는 유흥가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 극장들은, <남채화>의 '양원붕처럼, 일반적으로 '~붕'으로 일컬어지면서 배우이야기꾼·광대인 형극꾼 곡예사 차력사 등 각종 연예인들의 공연 활동에 사용되었다. 구란은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인 '희대'와 그 맞은편에 마련되는 일등석에 해당하는 '신루'를 주축으로 하여 그 좌우 양쪽으로 나뭇가지처럼 배치되는 이등석(일반석)인 '요붕'이 자리 잡는 식으로 관중이 드나드는 출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난간으로 차단되는 형태의 건물 구조를 공유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걸상을 지하거나 땅바닥에 자리를 깔아 임시 관람석을 꾸미기도 했다. 극장과 극단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일부 사료들에서 언급되는 구란 내부의 구조나 용도 등을 통하여 원대에 이미 무대와 객석이 분명하게 분리된 오늘날과 유사한 구조의 극장이 존재하고 있 음을 알 수가 있다. 원대에 구란에서 연극 공연이 이루어질 때는 사전에 극장 밖 사방에 미리 포스터를 붙이고 그 입구에서 큰 소리로 호객을 했다. 극장 안에서도 "아무개가 이곳에서 연극판을 벌입니다"라는 식의 글귀가 적힌 깃발이나 간판 따위를 내걸고 쉴 사이 없이 음악을 연주하고 관중을 끌어모으면서 잡극이 곧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 잡극을 공연하기 바로 직전에는 무대에 등장하는 극중인물로 분장한 배우들이 무대 복장을 차려입고 음악을 맡은 악단과 함께 나와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곧 선보일 잡극의 제목과 함께 대강의 줄거리를 소개한 다음 공연을 진행했다. 그리고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면 비교적 지위가 높은 극 중 인물이 '사를 읊는다' 등의 지문(instruction)에 따라 극중인물과 극 내용에 대한 총평을 하면서 공연을 마무리했다. 이 경우 때로는 관중에 대한 서비스나 관중의 요청에 따라 짧은 단극(short play)이나 가무를 추가로 선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극장에서의 이 모든 상황들은 이 <남채화> 잡극 희곡에서도 단면적으로나마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고정된 극장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소도시나 농촌에서는 대개 현지 사당에 설치된 제단인 '묘대' 또는 '노대가 임시무대로 충당되었다. 이 경우 유랑극단인 '노기'나 임시극단인 '사화'의 공연 활동은 모두 이 위에서 진행되었으며 관중은 그 아래에서 공연을 감상했다. 소도시나 농촌에서는 대도시의 구란처럼 일상적으로 연극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고 동제가 있거나 명절이 되었을 때 한시적으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상설극장이 따로 마련되지는 않고 현지의 사당에 마련된 노천의 제단이 임시로 무대의 구실을 하거나 또는 간단한 목조 가건물을 임시로 설치하기도 했다. 중국의 북부 지역에는 이러한 용도로 사용된 원대의 노천 무대나 그 유적들이 지금도 도처에 적잖이 남아있다. 가장 간단하고 초보적인 극장은 우리나라의 마당극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의 좀 넓은 공 터를 임시로 극장처럼 활용하면서 관중이 모이면 연극을 공연하는 '타야가'라는 노천극장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예술적 기량이 떨어지거나 다른 이유로 말미암아 구란에서 공연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유랑극단들이 공연 활동을 벌였는 데, 여기에서도 그러한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원대 잡극 희곡의 체제
극적 구성
원대의 잡극 희곡은 일반적으로 네 개의 '절'과 하나의 '설자'로 이루어졌다. '절'은 연극적으로는 '막(act)'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정한 내용이나 목적을 가진 극 중 사건을 다루는 하나 이상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이에 비해 '설자'는 목조 건물에 박아 넣는 쐐기라는 뜻 그대로, 각 장면. 줄거리의 연결과 전환을 좀 더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안배된 극적 장치로 희곡의 도입부나 중간에 일종의 '막간 (interlude)'으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존하는 잡극 희곡들을 분석해 보면 네 개의 '절'과 하나의 '설자'로 구성된 잡극은 공연 3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공연하는 배우나 감상하는 관중 양쪽에게 모두 무난한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남채화> 극 희곡은 실사 없이 네 개의 '절'로만 구성되어 있다.
극 언어
잡극에서는 극 중 인물이 대화하거나 상황을 묘사하거나 심리를 표현할 때 크게 일상적인 어투로 이루어진 서사적인 대사와 악기 반주에 맞춰 부르는 서정적인 노래가 함께 사용된다. 잡극 이후로 중국의 고전극에서는 배역에 상관없이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쪽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13~14세기에 무대에 올려진 원대의 잡극에서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권한이 남녀 주인공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보통 이었다. 예를 들어, 이 <남채화>나 <간전노>, <오동우>처럼 주인공이 남자인 작품은 '말본'. <격강투지> <회란기>처럼 주인공이 여자인 작품은 '단본'이라고 불렀다. 잡극에서 대사와 노래는 서로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대사나 대화를 엿섞어 연출하는 기법도 수시로 시도되었다. 잡극에는 대사와 노래 이외에도 주요 인물이 등장하거나 퇴장할 때는 해당 인물을 소개하거나 특정 상황을 고지하는 시를 읊었는데, 등장시를 '상장시(詩)' 퇴장시는 '하장시'라고 불렀다.
극음악
잡극은 연극 장르의 특성상 오페라 범주에 속한다. 잡극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뜻이다. 잡극의 각 대목은 연극적으로는 '절'이나 '설자'로 불렸지만 음악적으로는 투수(套數)'라고 했다. 잡극의 극음악에는 정궁(正宮) 중려(中呂)·남려(南呂)·선려(仙呂) 황종(黃鍾)·대석(大石)·쌍조(雙調)·상조(商調). 월조(越調) 등 아홉 가지 궁조가 사용되었는데 투수는 이 중 하나의 궁조로 구성되는 서로 완결 독립된 악장이었다. 각 투수는 <점강순> <천하락> 등과 같이, 해당 극 중 상황이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소곡 즉 '곡패'들이 한두 곡에서 십여 곡까지 사용되었다. 이때 사용되는 음악은 당송대 이래의 궁중 음악과 송금대의 민간 음악 등 복 방계 음악의 7음계 체제를 계승한 까닭에 5음계의 남방계 음악에 비해 훨씬 힘차고 장엄하고 찬 느낌을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배역
금대 원본의 공연 체제를 계승한 원대 잡극에서 배역은 크게 말.단.외.정.잡'의 다섯 가지로 이루어졌다. '말(末)은 이 중에서 주역을 맡는 남성 배역인데, 특히 노래를 하며 극을 주도하는 남주인공은 '정말', 주연급 장수로 등장하는 경우에는 '충말'로 구분되있다. '단(旦)'은 주역을 맡는 여성 배역인데, 특히 노래를 하며 극을 주도하는 여주인공은 '정단(正旦)', 이를 보조하는 역을 맡는 경우 '차단'이 추가되었다. '외(外)'는 극 중 줄거리의 발전에 중요한 단서를 마련해 주는 조연 배우, '정'은 기질이 거칠고 씩씩 호걸이나 장수 또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역 배우, '잡은 주로 극 중에서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은 단역(extra)을 맡거나 공연의 원활한 진행을 돕는 스태프 역할을 맡았다. 명대 말기가 되면 여기에 점'에서 분화되어 주로 슬랩스틱이나 개그를 통해 희극적인 역할을 맡는 '축'이 새로 추가된다. 이와 함께 이 작품에서 남재화를 잡고 늘어지는 동네 아이들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 역할을 맡는 '래아' 또는 '래'라는 배역도 운용되었다. 원대 잡극의 이러한 독특한 배역 체제는 등장인물 자체에 대한 예술적인 분석에 근거한 구분이라기보다는 공연 과정에서 배우를 간 분업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 아이링 '홍 장미 백 장미' (2) | 2025.03.21 |
---|---|
안데르센 원작 차범석 각색 '그림 없는 그림책' (2) | 2025.03.20 |
미셀 아드리안 '맨 프라이데이' (2) | 2025.03.19 |
매튜 배리 원작 '피터팬' (2) | 2025.03.18 |
넬 던 '욕탕의 여인들' (2) | 2025.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