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뢰정의 습격으로 폭발하면서 서서히 침몰하는 선박의 모습이 그려지고,
뒤이은 통곡하는 바다가 한숨을 내쉬며 신음하는 바람과 합쳐져 메두사 소리를
내는 으스스한 분위기가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는 극이 시작되면서 안개 사이로
구명보트가 나타난다. 어른들 세계에서 추방된 공동 운명의 여섯 소녀와 여섯 소년이
그 안에 타고 있다. 음료수와 식량을 찾기 위해 보트 안을 살피던 중 한 천막 속에서
9살의 빨간머리 소년을 발견한다. 폭격시 심한 충격으로 말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이
13번째의 어린 승객에게 새끼여우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다.
둘째날 이제 13명의 어린이들이 처음으로 함께 식사할 때, 앤의 머리에 학교에서의
종교 수업시간, 그리고 부모에게서 들었던 기독교 미신이 떠오르면서, 그녀는 그것이
결코 좋은 징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앤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회상케하는
13이란 불길한 수가 그들 모두를 파멸로 이끌어갈 것이란 미신적 공포를 퍼뜨린다.
즉 13명이 한 보트에 타고있는 한 자기들이 구조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려 한다.
앨런만이 앤의 광신적 미신에 현혹되지 않는 유일한 소년이다. 앨런은 비록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에 의해 그녀의 말과 행동의 모순을 지적한다.
앨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앤은 모두에게 앞으로 모든 식사 때에 제외되어야할 자를
추첨으로 정하자고 설득한다. 13번 째, 즉 유다는 속죄를 위해 희생돼야 한다는 것이다.
추첨을 한다. 앨런은 십자가 표시된 희생의 제비가 바로 앤에게 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재빨리 모든 추첨들을 바닷속으로 던짐으로써 우연에 의한 한 인간의 희생을 막는다.
앤은 차츰 메두사와 같은 요괴로 변하면서 승객의 수효를 열둘로 줄이려한다.
어린이 들로서는 누가 13번째의 승객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그들 중 가장 작고, 가장 약한 새끼여우인 것. 앨런은 그를 보호하고 나선다.
앤이 나흘 째 되는 날 여우새끼를 제거하기 위해 폭력을 쓸 것을 모두에게 제의하자,
앨런은 다시 한번 모두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기독교의 계명을 준수할 것을 경고한다.
뒤이은 앨런과 앤의 논쟁에서 이제 극적 긴장과 갈등이 생겨나며, 둘의 첨예한 대립이
드러난다. 그러나 앤 은 앨런과의 논쟁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항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거짓된 사랑을 구실로 앨런에게 접근한다. 앨런이 앤에게
그녀와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고 얘기했을 때 앤은 이 꿈을 앨런의 구혼으로 이해한다.
앤을 좋아했었던 앨런은 그들의 결혼으로 자신의 꿈이 실현된 것으로 생각하며,
나아가 모두의 흥분과 감격에서 13번째의 아이를 죽이려는 그들의 은밀한 의도가
사라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결혼식이 거행되고, 앨런과 앤이 삶과 죽음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서명한 메모와 함께 통신병이 바닷물에 띄어진다.
그리고 그날 밤 새끼여우는 살해된다. 어린 신혼 부부가 첫날밤을 지내러 천막으로
들어간 사이 나머지 어린이들은 앤의 사전 지시에 따라 캄캄한 밤중에 그 벙어리 소년을
바다로 던져버린 것.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는 절대적 계명에 대항하는 적자생존의
법칙과 기독교 미신을 쫓는 비도덕적인 다수의 결정에 의해 여우새끼의 존재는
생존권이 있는 자들의 명부에서 삭제되고 만 것이다.
7일째 되는 날 끊임없이 노를 젓던 어린이들은, 수상비행기를 발견하게 된다.
조종사는 위험을 생각지 않고 극한 상황에서도 마치 결혼식을 치루듯이 삶에 몰두한
어린이들에게 모두들 작은 영웅들이라면서 격려와 축하인사를 보낸다.
다른 어린이들이 먼저 구조되어 보트를 떠나자, 앨런은 새끼여우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이제야 앨런은 결혼식과 앤의 사랑의 고백이 단지 그 소년을 살해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구조받기를 거부한다.
앨런은 새끼여우의 죽음을 모든 세상 사람의 책임을 돌리며, 구조를 거부한다.
어린이들이 이미 그렇게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그런 세계로
돌아갈 수가 없다. 적의 정찰기가 접근해 오자 조종사는 앨런을 구조하려는 시도를
단념한다. 앨런은 홀로 남아 새끼여우의 유물인 회중전등으로 자신을 비추자
곧 적기에 포착되어 기관총 사격을 받아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자세처럼 죽는다.
그리고 일제 사격을 받은 보트 역시 빠른 속도로 가라 앉는다.
“다시 한번 다 이루어졌다”라는 성경의 귀절로 막을 내린다.
카이저는 1938년에서 45년까지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2차 세계대전이 그 정점에 이르렀을 때 <메두사의 뗏목>을 썼다. 즉, 이 드라마는 1940년에서 43년까지 3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1945년 2월 24일 연출가 로베르트 피르크에 의해 바젤에서 초연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리스신화와는 상관없고 <메두사의 뗏목>은 극작의 시기로 보아 표현주의가 종언을 고한 훨씬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작품의 언어면, 특히 서극과 에필로그의 폐부를 찌르는 간결한 언어, 독특한 장면의 구성,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주인공의 죽음,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유형화 등에서 아직 표현주의의 제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새로운 인간에 대한 환상적 이상, 인간의 고유한 선에 대한 믿음 등 표현주의 시기의 이상주의는 이 작품에 서 찾아볼 수 없다. 드라마의 구성은 머리말, 서극, 본극인 7개의 장면들과 후극으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말에는 실제의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는 수송선의 침몰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즉 카이저는 19세기 초 일어났던 유사한 역사적 사건( 군인들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에 정착할 이주민 등 400여 명을 태운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한 것은 1816년 7월 2일이었다. 선장과 고급 선원 등 250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떠났고, 나머지 하급 선원과 승객 등 150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하게 된다. 그러나 12일에 걸친 표류 끝에 작은 범선 아르귀스호에 의해 구조된 것은 15명뿐이었다. 생존자들이 굶주림을 못 이겨 죽은 사람의 고기를 뜯어먹었다는 등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과 시련은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에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쓰게 되었으며, 당시 유럽에서 전개되었던 파시즘과 휴머니즘 사이의 갈등을, 대서양에서 7일간 조난당한 아이들의 의식 속에서 묘사하고 있다.
이 메두사의 뗏목이란 제목은 제리코라는 화가의 그림(아래 사진) 제목이였는데.. 이 그림 작품이 메두사호의 침몰 사건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이기에 이에 기인하여 같은 사건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 붙여진 제목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핵심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아마 구명보트 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13명의 아이들이 기독교에서 악마의 숫자로 부리우는 13라는 숫자로 인하여 어른들의 한 이야기들을 되내이며 같이 식사를 하며 보내는 걸 두려워 한 나머지 새끼여우란, 보트안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아이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사건일 것이다.. 아마 이는 어른들의 잘못된 모습과 구습들을 어린 아이들도 물려받아 또 새로운 잘못된 모습의 어른이 탄생되어 모습을 그린 듯 싶다. 더욱이나.. 배경적으로도 전쟁이라는 어른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자신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음에도... 어린 아이들이기에 이런 잘못된 모습들을 보지 못하고 어른들이 그렇게 하였기에 모든것을 수용해버리는 모습들이 안타깝다... 그리고 어쩌면 이 메두사의 뗏목이란 제목은 메두사가 인간에서 저주를 받아 마녀가 되었듯 이들도, 앨런이 사랑했던 앤도 이런 어린이의 순수함에서 어른들로 더렵혀져가는 인간상으로 이해해도 좋을듯 하다.
앨런은 처음엔 인간에 내재하는 선을 믿고서 이웃 사랑과 기독교의 계명을 따르도록 설득한다. 그러나 사악한 인간들과 살인하지 말라는 주 계명이 무시되는 전도된 기독교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는 인간과 세계의 가능한 개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결국 살인에 의한 새끼여우의 희생에 뒤이어 앨런의 자기 희생이 뒤따른 것이다. 그는 인간의 존엄을 저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적의 기관총 사격에 희생되고자 하며, 자신의 희생으소서 집단의 살인에 항의한다. 즉 새끼여우의 폭력에 의한 희생에 대해 대신 속죄하는 것이다. 구조된 다른 동료들, 즉 메두사에 현혹된 자들의 양심을 밝혀주지 못한채, 앨런은 자신의 인식과 '양심의 횃불'을 파멸의 차가운 물결 속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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