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온통 숫자들로 가득한 공씨 집이다. 공부인은 경대 앞에서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있다. 남들 부인의 이름을 들먹이며 수다를 떨던 공부인은 25년 동안
덧셈만 하면서 제대로 승진 한번 못한다고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어댄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위해 25년간 노예생활을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한다.
공씨의 사무실. 나나가 앞에 놓여있는 종이더미의 액수를 크게 읽으면,
공씨가 그것을 받아적는다. 나나는 숫자를 읽으면서 간간이 공씨를 은근히
유혹하지만, 아내에게 질려버린 그는 나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공씨는 오늘로 25년째 계속 똑같은 일만 해왔지만, 꼭 승진할 것만 같은 예감에
들떠있다. 벨이 울려 업무가 끝났음을 알린다. 사장이 들어와 공씨를 부른다.
내심 승진을 기대하고 있던 그에게 사장은 회사의 효율성을 위해서 계산기를
설치할 계획이라면서 공씨 에게 해고한다고 말한다.
갑자기 무대가 급하게 회전하면서 음악, 크게 울린다. 이윽고 암전된다.
공씨 집 식당. 공부인은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손님맞을 준비를 한다.
공씨가 집에 들어오자 늦었다며 바가지부터 긁어댄다. 이윽고 초인종 소리.
이어 4쌍의 남여가 일렬종대로 들이 닥친다. 남자들 옷은 공씨와 똑같고
여자들, 역시 똑같은 모양의 옷차림이나 색깔만이 다르다. 총 5쌍의 부부들
의자를 서로 붙여 원을 만든 후, 날씨 얘기등 잡담을 나눈다.
그때 초인종이 다시 울린다. 공씨가 문을 열자 경찰이 나타난다.
공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을 따라나서고, 의아해하는 제로부인에게
"오늘 오후 사장을 죽였어!"라고 말한다.
재판소. 공씨는 25년 동안 단 하루의 결근없이 충실하게 일해온 자신을
해고시킨 사장을 죽였다고 시인하지만 한번도 남에게 폐 끼친 일이 없단다.
그러나 배심원들, 일제히 '유죄'를 선포한다.
달빛이 창연한 공동묘지. 여러 목소리를 듣고 공씨가 무덤에서 나온다.
그때, 묘비 뒤로부터 도율 나타난다. 그는 사랑과 자비로 자신을 항상 이끌던
어머니를 칼로 모가지를 자르고 사형집행을 받았단다. 선배격인 도율로 부터
사후의 일에 대해 지도를 받는다. 두목이 시끄럽다고 소리치자, 같이 도망간다.
천국.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다. 모율가 편안히 쉬며 깊은 실망에 잠겨 있다.
이내 공씨가 주위를 살피면서 들어오다가 그를 발견한다. 모율는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벌 받을 각오가 되어있었는데 자기가 천당에 와 있게 되어 더
괴롭다. 뭐가 정의고, 뭐가 도덕인지, 뭐가 올고 그른건지 알 수 없단다.
그때, 공씨는 자신을 찾는 나나의 음성을 듣는다. 나나는 자기도 해고 당하고,
공씨가 죽은 후 자살하였다고 한다. 공씨와 나나는 옛일을 회상하고 서로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 천국에서 결혼하여 영원히 같이 살자고 약속한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온 모율은 이 천당이 깡패, 도둑, 창녀, 놈팽이, 술주정꾼
천지라고 말한다. 그러자 공씨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고 말하고
천국을 떠난다. 나나, 그의 뒤를 따른다.
지나치게 청교도적인 나머지 낙원마저 거절한 공씨는 이곳에서 다시
지구에서 태어날 것을 명받는다. 거대한 계산기를 작동하는 일을 맡게 된단다.
잠시 쉬었던 천국은 대기소이고 '희망'이라는 허상을 쫓으며 다시 지구로
돌려보내져 전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는 저주를 당한다.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계산기‘는 경제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하던 1920년대 미국사회를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엘머 라이스는 체제가 지닌 비인간적인 모습을 비판하면서 이 제도 하에서 효율성에서 밀려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인물들과 이러한 제도에 순응되어 점차 자신도 모르게 노예적 근성을 몸에 익혀 가는 인물들을 풍자적인 시각으로 그려나간다. 표현주의연극이 미국에 도입된 직후에 공연된 이 작품은 이러한 풍자적인 시각을 표현주의 방식으로 무대에 올려 이를 효과적으로 연출해낸 작품이다.
엘머 라이스의 원작을 김성진이 번안한 이 작품의 주인공인 공공칠은 기계처럼 단순하게 반복되는 직업과 잔소리도 무장한 아내에 의해 꽁꽁 묶여있는 전형적인 화이트컬러 노동자로 기계문명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대인을 대표하는 유형적 인물이다. 또한 101호, 102호 등의 숫자로 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은 기계화된 사회에서 개성을 박탈당하고 비인간화된 소외된 인간들이다. 공공칠은 25년간을 인간 계산기로 노예처럼 일만 해왔으나, 새로운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 직장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는 우발적으로 그의 사장을 죽이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죽기에 이른다. 일상에 묶여만 살아온 그는 낙원에서 영원한 행복과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오히려 그 자유와 행복이 견딜 수 없이 거북하기만 하다. 이미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에 낙원에서 조차도 노예로서의 자기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현대 기계문명의 공포를 강력히 시사해주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허상을 쫓아 그는 다시 기계의 노예가 되기 위해 지상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는 현대의 고달픈 삶 속에서 인간은 희망의 존재를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표현주의 극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중시되며 이러한 분위기는 대개 조명, 분장, 음향효과, 무대장치 등의 여러가지 왜곡된 형태를 통해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사실적인 분위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개연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논리적 연관성을 지니지 않고도 상상력과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이는 꿈꾸는 자의 의식속에서는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주의기법을 성공적으로 사용한 작품 중의 하나가 '계산기(The Adding Machine)'이다. 공공칠이라는 유형적 인물의 설정, 단절어와 외침, 합창의 사용, 사무실에서 몸은 기계처럼 일하지만 머릿속은 꿈꾸듯 자신만의 상상에 몰두하는 장면(2장), 또는 그로테스크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공동묘지(5장), 상식을 뒤엎은 낙원의 풍경(6장), 인간수선소라는 비현실적 공간의 제시(7장)등, 전형적인 표현주의기법을 우리는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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