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사무엘 베케트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

clint 2025. 2. 17. 04:50

 

 

 

크랩은 일생을 다 살아 버린 69세의 노인이다.

그는 소굴 같은 집 책상에 앉아 자기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앞뒤로 틀며

30년 전 자기 생의 전성기에 있었던 토막난 이야기를 듣는다.

전성기라 하지만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오랜 과부 생활 끝의 어머니의 죽음.

개에게 준 까맣고 단단한 공, 호수에서 표류 끝에 얻어진 정사 등

아주 개인적인 것들이다. 자신이 지적으로 절정에 혹은 그 근방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그의 나이 서른 아홉에 그가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우연히 주어진 것뿐이다.
그는 테이프를 통해 자기의 지나간 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신나 하고 때로는 욕지기를 하고 흥분한다.

특히 그가 반복해서 듣는 정사 장면 뒤의 거듭되는 휴지와 정적,

그리고 소리 없이 돌아가는 테이프 앞에 맞물려 움직이지 않는

그의 모습과 텅빈 시선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우리의 삶이란 구원도 없고 연속성도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와 반대로 미래에 희망을 걸고 현재와 과거에 무수한 의미를 주며 살아가고 있다. 자기의 삶에 너무 많은 희망을 걸다가 순간 순간 희망으로부터 현재로부터 과거로부터 소외되고 마침내는 세상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만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은 생을 알 수 없는 것일까?
내 생애의 가장 좋은 날들은 지나가 버린 것 같다. 행복해질 수 있었던 기회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시절이 다시 왔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겠다. 지금 내게 그때의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님에랴. 그렇다. 나는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다.” 젊음은 향수뿐이다. 지금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방황하고 고뇌하던 날들이 더 많았다. 크랩은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자신에 대한 구원과 탐구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에서 크랩은 자기의 생일을 자축하며 그간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요약하여 녹음하고 있다. 아무렇게나 휘갈려쓴 종이를 가지고 지금 그는 동굴같은 자기 서재에 혼자 앉아 보존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항들을 정리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 일은 그의 말처럼 쭉정이와 알곡을 골라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무대는 시종 두 개의 분명한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하나가 빛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가 어둠의 영역이다. 중앙에 있는 탁자 위에 놓인 하나의 조명등이 이런 구분을 확정짓고 관객과 크랩 자신의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빛과 어둠은 예로부터 많은 것을 연상케 해왔다.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영혼과 육체, 희망과 절망, 앎과 무지 등이 그 예인데 이 극에서는 어떤 개념을 적용해볼 수 있을지 그 결정이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이 빛과 어둠의 이미지를 단순히 직선적인 구분이 아니라 원형으로 에워싼 형태로 파악한다면, 상당히 많은 세부사항들이 이 바탕위에서 상호작용하기 시작한다. 크랩이 자기 인생의 일대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이 "알곡 고르기"이미지는 더 중요한 부분이 가운데에 있고 덜 중요한 부분이 원주의 주변에 있다는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극의 초반에 크랩의 움직임은 주로 빛의 원형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옮겨가는 정도였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이어지는 동작은 주로 책상을 중심한 빛의 영역에서 어두운 무대 뒷편으로 오가는 동작이다. 녹음된 내용 중에는 그가 자기 인생에서 빛과 어둠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느낀 계시같은 것에 대한 긴 설명이 있다. 그는 지금 그 발견을 경멸과 조바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빛과 어둠이라는 초점은 우리로 하여금 녹음 테입에 담겨있는 많은 다른 순간들에 주목하게 한다. 특히 여자와 함께 쪽배를 같이 타던 시간과, 그때 크랩이 보았던 어둠 속의 환상으로 우리의 눈과 귀가 쏠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관객들은 녹음 테입 속의 크랩이나 60대의 크랩이 말은 하면서도 정작은 모르고 있는 지식까지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단 크랩의 서재를 채우고 있는 원형의 빛과 그 밖에 있는 어두움에 주목하게 된다면, 우리는 또 이 역전상황, 즉 어두운 중앙을 빛이 외곽에서 에워싸는 상황에도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여자와 함께 쪽배를 타고있는 동안 크랩은 햇빛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는 여자 위에 몸을 굽혀 그늘을 만들어줌으로써 잔뜩 찡그린 눈을 뜰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결국 그가 주위의 빛으로부터 중앙의 어두움을 구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중앙의 어둠과 주위의 빛"이라고 하는 이미지는 바로 이어지는 두 남녀의 육체적 정신적 합일에 의해 그 의미가 더욱 강화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만일 우리 가 그 여자의 눈을 빛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모양은 다시 바뀌어 "중앙의 빛과 주위의 어둠이라고 애초의 이미지로 되돌아가게 된다. 사실 우리가 발견한 이 두개의 이미지는 각자가 상대의 중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빛과 어둠의 위치가 서로 바뀌는 상황은 크랩의 삶에서도 중요한 순간(대사 내용이 모호해서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 간파해 낼 수는 없지만)마다 반복된다.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던 날 그는 둑가에 있는 벤치에서 개와 장난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죽을 때 블라인드가 내려진 방은 밖의 대낮과 단절되어있으며, 그의 하얀 손에는 검은 공이 쥐어져 있었고, 그 공은 또 하얀 털을 가진 그 개가 삼켜버린다. 그리고 장례식에 어울릴 검은 유모차를 하얀 옷을 입은 젊은 미녀가 끌고 간다. 크랩이 살아가는 동안 매력을 느끼던 여인들, 혹은 그의 삶에 영향을 준 사람들에 대한 그의 기억은 이렇게 주로 빛과 어둠에 대한 것들인 것이다. 
극의 끝머리에 크랩이 허공을 바라볼 때 육체적으로는 무력한 상태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녹음 테입은 계속 돌아가면서 크랩으로 하여금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그 빛과 어둠의 이미지로 그를 집중시킨다. 크랩의 정신은 이제 이해의 빛에서부터 발견의 어둠으로 옮아가 끊임없이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은 어떤 가시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진 않지만, 크랩이나 우리에게 비슷한 주의와 가치를 환기시킨다. 베케트는 진기한 것을 잡아내는 예술, 옛 습관의 죽음과 새 습관의 탄생 사이에 놓인 순간을 잡아내는 예술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러한 순간들을 집합시키는 크랩을 통해 우리는 곤혹과 절망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끝내는 살아남는 생의 신기함과 만나는 것이다. 이런 귀중한 순간들이야말로 "호수 속에 빠지는 돌처럼 의식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고, 크랩과 우리 모두를 그 권위 있는 빛에서 나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매혹적인 어둠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