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여자가 집에 있는데 갑자기 한 젊은 남자가 집에 도착한다.
아버지에 의해 쫓겨난 후 몇 해 동안이나 가출하여 소식 없었던 이 집 외아들이다.
그동안 세상을 돌다 지친 삶을 마감하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결국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전혀 생사를 알 수 없도록 소식 단절 상태로 있었지만
식구들이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술 취한 사람처럼, 늙은 이처럼, 곧 쓰러질 것 같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아무 대화도 없이, 그는 지금 어릴 때부터 지내던 자기 방에 돌아와 자고 있다.
쉬기 위해, 죽기 위해, 자신의 길을, 자신의 방황을 끝내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그녀들이 잠든 그의 침대 주변으로 서성댄다.
그를 보호하고 서로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다.
발소리도 죽이고, 그가 부재하는 동안의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작은 목소리로 하면서, 그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작품은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텍스트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 제목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 자체가 이 작품의 첫 출발이자 작품전체를 관통하는 라이트 모티브이다.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는 구조 속에서, 이 작품에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갈등 구조도 없다. 이 작품은 같은 음계 속에서의 다양하고 미니멀한 변주처럼, 기다림이라는 상황 속에서 보이지 않게 완성되어 가는 비극이다. 이 작품 속에서 한마디도 에이즈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지만 에이즈로 죽은 작가 라갸르스와 같은 운명처럼 죽음을 앞둔 인물이 등장한다 .<참고 작품 '먼 나라' 에 나오는 루이라는 인물처럼>. 5명의 여성 인물이 계속 언급하는 유일한 남성 인물이 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어 그 인물은 부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한마디 말없이 잠든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다섯 여자들의 느린 무곡이자 (파반)이자, 소리 없는 춤이다. 또한 기다림, 불평, 분노, 비난, 죄의식, 소란, 터져 나오는 증오심, 외침과 속삭임, 관계 청산과 절규, 욕망, 고통, 광기 등의 다양한 굴곡의 감정이 든 다섯 가지 색의 화성악이다. 5명의 여자 인물들은 하녀나 수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조용히 죽은 자의 염을 하기 위해 있는 사람 같은 느낌도 준다. 시적인 언어를 통해서 부재한 인물을 존재하는 인물로 만들어 낸다. 작은 눈송이가 불어나 눈사람을 만들듯이, 그녀들의 한탄, 비탄은 비가 되고, 빗방울 방울 속에서 물거품을 만들고, 파도를 만들어 낸다. 파도는 또 다시 물거품을 만들어내고, 결국 반복적인 밀물, 썰물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마침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쉼표로 다 되어 있는 시이자, 반복이 많은 서사시이다. 5명의 여성인물들은, 한 여자가 다섯 여자일 수도, 다섯 여자가 한 여자일 수도 있는, 마치 러시아인형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한 사람 속에 여러 세대가 들어 있고, 그 반대로 여러 세대는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중첩된 모습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나이도 지시된 바 없다. 그렇다고 할머니, 어머니, 큰딸, 작은 딸, 막내딸 하는 식의 가족 관계로 설정되어 있지 않고, 가장 나이 많은 여자, 가장 나이 어린 여자, 어머니, 장녀, 차녀 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 가족 같기도 하면서도, 자매, 부인, 어머니, 연인처럼 가족 아니게 볼 수도 있도록 텍스트를 열어두고 있다. 작가의 개요를 보면, 이 인물들을 베르히만의 영화 <외침과 속삭임>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볼 수도 있게, 그런가 하면 그리스 비극처럼 엘렉트라, 크리소테미스, 이피게니아, 클리템네스트라, 잡혀온 트로이여인으로, 젊은 남자는 오레스테트로 볼 수 있게, 그런가하면 올가, 마차, 이리나, 나탈리아 이바노바, 안피싸 할멈 같은 체홉의 <세 자매>에 나오는 인물처럼 볼 수도 있게, 영국 에밀리 브론테 소설에 나오는 자매들과 남동생처럼 볼 수도 있게 암시해 두고 있기도 하다.
2시간에 가까운 공연에서 다섯 여자는 끊임없이 말을 뱉는다. ‘그 애’의 귀환이 다섯 여자의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여자들이 품었던 꿈과 욕망을 폭발시켰다. 아버지가 그를 내쫓은 일과 각자가 기억하는 그때의 상황, 그를 기다리면서 가진 희망과 자신의 삶을 되찾고 싶던 바람을 꺼내 보인다. 긴 독백과 짧은 대화를 퍼즐처럼 꿰어 맞춘 뒤에야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애’가 왜 집에서 쫓겨나야 했는지 끝까지 말해 주지 않지만, 라갸르스가 성소수자였던 것에 덧대 보면 가족들이 그렇게 기다려 주길 바랐던 자신의 소망을 녹여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늘 그렇듯이, 늘 그래 왔듯이, 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리고 서서히 내려가면서 우리 집에서 멀어져 가는 전원 풍경을, 숲을 돌아 사라지는 길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 저기.”
여자의 독백은 시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리고 길다. 듣고 있으면 가닥을 잡게끔 하는 암시가 놓여 있다. ‘아버지에게 쫓겨’난 ‘그 애’를 오랫동안 ‘당신들과 나, 우리 다섯’이 기다려 왔다. 여성이 늘 그랬듯이 ‘저녁마다, 문턱에서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그 애’는 돌아왔다. 그런데 명확하게 콕 찍지는 않는다. ‘그 애’가 남동생인 것은 확실한데, 독백하는 여자가 첫째인지 둘째인지, ‘당신들’이 누구이고, ‘그 애’는 왜 쫓겨났는지 알 수 없다. 그 의문은 가장 나이 많은 여자부터 가장 나이 어린 여자까지, 다섯 여자가 쏟아내는 대사를 단서로 관객이 채워 넣어야 한다.
라갸르스는 프랑스 창작극의 산실인 ‘열린극장’에서 한 달 동안 배우들을 보면서 작품을 썼고, 1994년에 낭독공연을 올렸다. 라갸르스가 에이즈로 사망한 2년 뒤인 1997년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공연하면서 그해 프랑스비평가협회가 선정한 불어창작극 중 최고작으로 뽑혔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장-뤽 라가르스 (Jean-Luc Lagarce)는 1957년 2월 14일 프랑스 오트- 쏜느 지방 에리쿠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프죠 공장 노동자로 있던 바랑티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975년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하기 위해 브장송에 온 그는 브장송 국립연극원에도 등록한다. 1977년 연극원 동기들 과 아마추어 극단, “마차극장”을 만들어 자신이 연출을 맡고 베케트, 골도니, 자기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기 시작한다.
1979년 자신의 희곡<카르타고>가 '프랑스 월튀르' 라디오 방송에 낭독 형식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여 그 이후 여러 편의 희곡이 방송에서 낭독된다. 1980년 브장송대학에서 "서양에서의 연극과 권력”이라는 논문을 써 철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1981년부터 프로 극단이 된 "마차극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연극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라신느, 몰리에르, 마리보, 페이도, 라비쉬, 이오네스코 같은 대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비연극적인 작품을 각색한 작품이라든가, 자신의 희곡을 포함한 20편의 작품을 연출한다. 1982년, 자신의 작품 <마담 크니페르의 동 프러시아 여행>이 장-클로드 팔의 연출로 당시 코미디 프랑세즈 주관이던 오데옹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첫 작품이 자신의 극단 외부 연출가가 공연하기 시작하고, 그의 희곡이 '열린 연극'에서 출간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다른 연출가에 의해 자신의 네 작품이 공연된다. 1990년 이후부터는 그의 작품이 계속 공연되고 출판되면서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1988년에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기 전부터 질병, 죽음, 실종에 대한 테마를 작품 속에서 다루고 있었다. 특히 1982년에 쓴 <페스트가 있던 해의 막연한 기억들>에서 이러한 암시를 하고 있었다. 83년과 88년에 국립 문예진흥원의 지원금을 받은 바 있는 그는 1990년 빌라 메디시스에서 제정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상' 수상으로 창작 지원금을 받아 베를린에 6개월간 체류한다. 거기서 작품 <세상의 끝>을 쓴다. 그 이후 자신의 희곡이 작품심사에서 거부되는 일이 일어나자 2년간 집필을 중단하고 주로 연출과 각색에 몰두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먼 나라>라는 작품을 다시 개작한다. 1995년 9월 30일, 37세의 나이로 <루루>라는 작품을 연습하다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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