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배삼식 '이른 봄, 늦은 겨울;

clint 2024. 12. 16. 08:56

 

 

프롤로그
다도, 복잡함 속의 여유 꽃봉오리 피어오르는 매화차 한 모금.
한 시절 잠깐 반짝이다가 스러지는 향기
매화분을 안고 있는 늙은 여인
그 놈의 영감은 마누라 두고 매화만 쓰다듬었다네
나부산에서 길 잃은 수나라의 조사웅, 눈보라 속에 길 잃은 등산대원
때로는 매화의 향기에 취해 정신 줄을 놓거나 잡는다.
애가 타서 뒤틀린 검고 이상한 나무, 어떤 손이 가지를 잡고 있다.
혹은 무엇을 기다리나
꽃잎 하나에 영글지 못한 채 지던 꿈들
이렇게 잠깐 오려고 그렇게 멀리 갔던가
잎도 열매도 잊고 걸어온 모든 길들과 다가올 날 모두 잊고
오라, 다만 한 송이 매화여
퇴계 이황의 도산매, 매죽헌 성삼문의 매, 매월당 김시습의 매 월매의 매
여기저기 매화타령, 좋구나 매화로다.
매화 그리고 휘파람새 (고려설화) : 님 떠나보낸 도공의 슬픈 옛 이야기 하나
달의 꿈, 항아리의 꿈. 여인의 꿈. 매화가 여자인지 여자가 매화인지
달 항아리가 여자인지 여자가 달 항아리인지
꿈과 대화의 흔적.
매화우 梅花雨 (매실이 노랗게 익을 무렵 내리는 장마비)
자욱한 꽃그늘 아래 당신이 가고 난 그 자리에 부슬부슬 비가 내려요 들려요. 
소곤소곤 오는 그 소리 동그만 당신이 돌아왔어요
에필로그 
탐매행. 이유도 많고 많은 세상 속 가끔은 이유 없는 일도 있어야 하듯 
한겨울에 피어난 매화를 찾아 길을 나선다. 

 



작가의 글 - 배삼식
남도 어느 절집 어귀였던가. 봄이랄 수도 겨울이랄 수도 없는 시절, 대숲 사이에 어느 혼자 피어있는 매화를 보았습니다. 비랄 수도, 눈이랄 수도 없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한참 그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분명 있으나 아무래도 이곳에는 속하지 않은 듯한 꽃 앞에서 저는 깬 채로 꿈속에 있었지요. 그토록 가녀리고도 확고한 것이 또 있을까요. 꽃 한 송이가 온 우주를 멈추어놓고 저 혼자 가만가만 흔들립니다. 흔들리며 나를 다른 시간으로 데려갑니다. 현실도 비현실도,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그 아득한 사이에서 저는 말(言)을 잃었습니다. 말 너머에 있는 순간을 말로 붙잡으려 하는 것은 애초에 가망 없는 일이지요. 한 가지 다행은 이 말들이 무대를 향하고 그곳에서 몸을 입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말 따위야 죄다버려도 좋습니다. 이 무대가 말들에 갇히지 않기를. 이 모든 말들과 소란이 지나간 뒤에 혹은 그 사이에, 말로는 가둘 수 없는 말을 잊게 만드는 순간들이 가만히 맺힌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잠깐 지나왔지만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거기 있는 그날, 매화처럼. 무대 또한 한 송이 꽃 아니겠습니까. 
겨우내 매화를 찾아 길 없는 눈밭을 지나오신 서울예술단 배우와 스태프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이미 여러분 얼굴 하나하나가 점점이 피어나 매화가 되었습니다. 그 화사한 꽃그늘 아래로 저도 놀러가겠습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매화들. 
나부춘몽 羅浮春夢
중국 수나라 조사웅(趙師)이라는 사람이 나부산(山)에 놀러 갔다가 그만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 쉴 곳을 찾았는데, 마침 소복(素服)으로 단장한 미인(美人)을 만났다. 이에 함께 주막에 들어가 밤새도록 정겹게 술을 마시다가, 결국 술에 취에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미인도 주막도 없고, 자신은 큰 매화나무 아래에 누워있었다. 주위에는 푸른 깃털을 가진 새가 지저귀고 있었고, 해가 점점 떠오르고 있었다. 조사웅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퇴계와 매화
퇴계 이황(1501~1570)은 매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퇴계는 단양군수로 재직하는 중에 만난 기녀 두향이 선물한 푸른 빛이 도는 매화를 정성들여 가꾸었고 그가 풍기군수로 옮겨가면서 매화나무도 도산서당으로 옮겨 심었다. 퇴계는 매화가 한창인 이른 봄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화를 완상하였고, 매화분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기도 했으며, 달이 밝으면 손님과 함께 매화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화답하기도 했다. 그는 이질로 고생할 때, 설사를 해서 방에서 냄새가 나자 매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라 지시하였고, 임종을 앞두고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고 유언을 남긴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매화를 다룬 퇴계의 시들은 단행본으로 만들어진 시집 매화시첩에 수록되어 있다. 

 



탐매행探梅行
옛 선비들은 풍류적인 행사로 이른 봄 처음 피기 시작한 매화의 그윽한 향기를 찾아 눈길을 나섰는데, 그것을 심매 또는 탐매행 했다. 그들은 어느 산골에 희귀한 매화 이라고 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지필묵과 술과 안주를 준비해 나귀의 등에 올라타 여정에 올랐다. 그들은 탐매의 길에서 매화나무를 만나면 그 아래에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매향에 취해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선비들이 연례적으로 탐매행에 나서는 것은 단순히 매화꽃을 감상하거나 풍류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른 봄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되새기며 새해 소망을 다지기도 하고 정신을 정갈히 하기 위해 길을 헤맸던 것이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형진 '발칙한 녀석들'  (2) 2024.12.17
뮤지컬 김추자 전  (2) 2024.12.16
뮤지컬 '광화문 연가'  (4) 2024.12.15
천승세 '만선'  (3) 2024.12.14
최인호 '달리는 바보들'  (6) 2024.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