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장례식장에 조문하러 간다.
은수가 갈 때마다 마주치는 오지랖 넓은 상조 도우미 정은.
정은은 은수가 아들의 장례를 치를 때 왔던 상조 도우미다.
은수는 피하려고 하지만 정은은 어느새 다가온다.
말을 걸고, 밥을 권하고, 술을 건네고 마주 앉는다.
은수는 점점 정은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정은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은 반짝이는 ‘은의 혀’를 가졌다고
허랑한 가족사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정은의 어머니, 외할머니, 외증조할머니가 모두 "은의 혀"라고,
그래서 자기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은의 혀라고...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마주하는 둘.
떠난 아들의 흔적을 바라보는 눈이 텅 비어버린 여자와
그 사이, 성큼 다가와 조금은 요란스럽게
자리한 반짝이는 은의 혀를 가진 여자.
유쾌하지 않은 만남 속 보이지 않는 선을 두고 있던 둘이지만
각자의 틈을 마주한 순간,
그들 사이의 경계선은 점차 흐릿해지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누가 무슨 관계냐고 물으면 그래요. 서로 폐 끼치는 관계라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보단 ‘나’라는 말로 각자의 의견만을 강조하는 현재,
최고를 위해 서로가 경쟁하고 효율을 재기 바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순간을 지켜내며 살아가고 있을까.
여기, 빛이 들지 않더라도 분명하고 또렷하게 존재하는 인물들이 있다.
사회적 지위 뒤에 가려져 놓쳐버린 겹겹의 순간들 위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이들.
찰나의 순간이 연속되고 점차 선명해질 때,
이들은 개개인이 익숙해져 버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같이’가 당신에겐 어떤 의미로 닿아있는지.
돌봄의 현장에서, 때론 소외되고 때론 크나큰 상처와 슬픔을 안게 돼
벗어나기 힘든 이를 어루만지는 사람 또한 상처를 안은 사람과
같은 동류라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으로 해체를 목도하는 한국 사회에 담담하지만
활기차게 손 내미는 작품이 <은의 혀>이다.
작가의 말 - 박지선
한사람의 생애가 한사람의 생애에 얹혀 둘이 무너져 내린 밤
그것은 셋이 넷이 아니, 우리가 무너져 내린 밤
놓쳐 버린 손의 밤 놓쳐 버린 숨의 밤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마음
약해 빠져서 기꺼이 약해 빠지는 마음
그 마음에 '하는' 통증
우리는 파이터다.
-내 입속에 가둔 '은의 혀'를 풀게 용기준 국립극단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이 작품은 중장년 여성들이 일하는 돌봄 노동의 현장을 다룬 신문의 짧은 기사에서 비롯됐단다. 작가 박지선은 기사 안에 다뤄진 사회적 주류의 시선에 벗어나 있지만 분명하고 또렷이 존재하는 인물, 무대의 주역으로 만나기 힘든 중장년 여성들을 발견했고, 그들이 겪는 노동과 돌봄의 서사를 아름다운 문체로 집필해 그녀들의 ‘서로 폐 끼치는 삶’을 따뜻하게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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