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차근호 '조선제왕신위'

clint 2024. 11. 6. 09:04

 

 

 

때는 조선조 인조의 제삿날, 인조 자신은 제삿날 혼령이 되어 나타나

자신이 즉위하던 당시의 실록을 보게 된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인조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삼배구고

두례를 행하게 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청나라에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죽음을 맞는다.

인조는 자신이 광해군을 폐위시킬 때 가장 유효했던 ‘패륜’이란 명분으로써

자신의 아들인 효종마저 폐위시킬 힘을 갖고 있는 반정의 명분임을 깨닫게 된다.

효종은 노대신에게 자신이 응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고

노대신은 아들을 독살한 아버지의 죄를 효종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효종은 숙고 끝에 반청북벌에 보내졌던 군사를 되돌리고,

대신 소현세자의 죽음을 영원히 역사에서 지우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인조의 혼령은 안타까워 하면서 효종을 말리려 하고,

그때 소현세자의 영혼이 나타난다.

소현세자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인조의 손을 잡고 영계(靈界)로 돌아간다.

효종은 앞으로 그 누구도 소현세자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로

북벌을 철회한다.

 

 

 

 

작가의 글 - 차근호

<조선제왕신위>는 370여 년 전에 있었던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는 교과서를 들추어 보지 않으면 기억도 하기 힘든 ‘인조’라는 인물에 대해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오래된 역사 속의 인물과의 대화를 시도하게 했을까? 아마도 370여 년 전의 과거 속의 사건과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어딘지 우연하게 나마 비슷함이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분절시킬 수 없는 유기체이자, 거대한 인과율의 논리로서 바로 ‘지금’이라는 시점과 연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들의 시간에는 수많은 과거의 역사가 오버랩되어 있으며, ‘지금’이란 시간은 그 역사들이 만들어놓은 인과율의 논리 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단 인조반정으로 상징되는 역사의 사건이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들과 연계되어 일차적인 해석으로만 끝나기는 바라지 않는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아니면 ‘역사는 반복되는가?’ 이 두 개의 질문 앞에서 나는 고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역사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라는 말을 하려고 한다. 설령 우리의 판단이 상대적이며, 시대와 공간에 따라 재평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할지언정 역사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열려있는 세계로서의 역사에 일단락을 내리는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의 역사를 보다 나은 가치의 세계로 지향케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인조와 소현세자, 이 둘의 갈등은 정(正)과 반(反)의 역사의 충돌이며,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의 충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작품 안에서나마 인조와 소현세자, 이 부자의 피맺힌 갈등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부자의 화해라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의 화해란 그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조선제왕신위>는 실험극장의 저력과 함께 차세대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20대 후반의 작가와 30대 중반의 연출가가 대극장 무대를 중후하면서도 세련되게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조선제왕신위>는 제목에서부터 짐작되듯이 ‘역사극’이다. 광해군을 내몰고 왕권을 장악한 인조반정으로부터 소현세자의 죽음과 효종의 집권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단순히 지나간 역사를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한 시대의 격동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순환적인 역사와 오늘의 정치적 현실을 알레고리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기는 하지만 작가의 역사인식에 따라 원재료들이 재구성- 재창조된다.
연극은 인조가 자신의 제삿날 혼령으로 나타나 재위기간을 기술한 실록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현재화’하여 관객들의 몰입을 유도하지 않고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반추한다는 ‘역사화’를 전제함으로써 객석의 비판적 사유를 요구한다. ㄷ자형 계단식의 열린무대와 그 가운데 작은 미니어처로 만들어진 궁궐, 내레이션의 적절한 활용과 돌발적 돌출 행위들은 ‘소외 효과’를 유발하여 관객들이 무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궁궐 모형의 한 부분을 분리하여 활용하거나 인형들을 조합하여 연출하는 것, 심지어 배우들이 미니어처 안에 들어가 연기하는 장면 등은 파격적으로 사실성을 내파해 버린다.(…) 역사에 대한 꼼꼼한 천착과 역사를 빌려 오늘의 현실을 은유하는 차근호의 극작술은 오태석의 방식을 강렬히 느낄 수 있다. 형태만 다른 독재정치의 섣부른 화해로 왜곡된 우리의 정치현실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하지만 그 의미가 뚜렷이 가시화되지는 못하고 있는데 극작이나 연출의 양면에서 보다 확고한 양식화와 현대성이 확보되지 못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호재와 강태기의 열연을 비롯하여 실험극장 출신의 중견배우들이 호연하고 있으나 젊은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함을 제대로 살려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역사극의 진정한 가치는 오늘의 관객들에게 얼마나 진실한 공감을 주느냐에 달려 있다. 보다 과감하게 동시대적 인식과 감각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다. 차근호의 범상치 않은 재능과올해 들어 신진 작가를 연이어 발굴, 육성하고 있는 실험극장의 ‘실험성’에 갈채를 보낸다. - 세계일보, 1999년 12월 24일, 김미도의 평.

 

 

 

 

 

실험극장이 막 올린 연극 <조선제왕신위>에서 가장 흥미롭던 부분은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에 관한 연극적 가설이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집권한 인조는 통치력 면에서 광해군만 못했으며, 이를 끊임없이 비판해온 아들 소현세자와 갈등을 키워가다가 끝내 아들을 살해했다.’ 정사(正史)엔 소현세자가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까지도 인조의 독살설 등이 있는 대목이기에 상당히 그럴싸한 가설이다. 극 중 칼을 든 아버지의 아들 살해장면은 이 연극이 보여주는 가장 비극적인 갈등의 한 모습이다.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지만, 역사와 마음대로 대화해가는 이 연극을 370년 전 이야기로만 읽을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권력 찬탈과 방어의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옛일들은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있었던 군사 정변들을 솜씨 있게 환기시킨다. 인조반정과 인조식 정치행태의 옳고 그름을 끊임없이 따져보게 만드는 이 연극은, 현대 한국사에 관한 성찰의 연극이기도 하다. 스스로 ‘혁명’이라 선포하며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 자(인조)가 청에 굴욕외교를 하는 등 통치면에선 자신이 무너뜨린 이전 집권세력(광해군)만도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연극이 드러내는 최대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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