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은 반지를 껴 높은 지위의 인물임을 드러내는 통치자 ‘니임’은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동작을 강요하며 그들에게 가면을 씌워 표정조차 획일화시킨다.
그런데 유독 ‘노옴’만 이를 제대로 따라하지 못한다.
노옴이 의식적으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열심히 노력해도
그렇게 획일적으로 잘 움직이지 못할 뿐이다.
그때 한 여인이 생명을 예언 받고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가 ‘그이’이다.
그이는 사람들과는 달리 표정이 풍부하며 대중들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다.
그이는 노옴을 만나 그의 가면을 벗겨주며,
노옴은 비로소 자신의 표정을 찾고 인간으로서의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대중들은 노옴의 이러한 일탈을 반가워하지 않으며
니임은 이를 무력적으로 제재한다.
통치자 니임은 문제의 근원이 그이에게 있다는 점을 알고,
그이에게 가면을 쓰도록 지시하나 그이는 거절한다.
니임은 억지로 그이의 얼굴에 가면을 씌운 후 십자가에 못박는다.
죽은 그이의 가면이 두 쪽으로 갈라져 부서지며,
그 안에서 그이의 살아있는 눈이 보인다.
노옴을 비롯한 대중들의 가면이 하나둘 벗겨지며
마지막으로 니임의 가면이 벗겨진다.
1979년 극단 가교에 의해 공연된 「개뿔」은 우여곡절을 겪은 작품이다.
제3회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으로 「개뿔」이라는 제목 하에 원고지 350매 가량의 대사로 이루어진 작품이 준비되었으나 미국에서 돌아온 연출가 이승규가 무언극을 제안한다. 이에 따라 이미 선정된 공연제목을 버릴 수도 없고, 내용은 선정된 작품과 거리가 먼 무언극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제목과 공연 내용이 서로 다른 채 공연을 올리는 편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따라서 「개뿔」은 이강백의 모든 작품 중에서 제목과 내용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개뿔(속칭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동시대의 천대받는 인권에 비유하고, 독재 권력의 남용으로 비인간화되는 현실을 개판(속칭으로 몹시 난잡하고 엉망인 상태)으로 상징화시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리들은 같은 표정의 가면을 쓰고 같은 직물(삼베)로 지은 옷을 입었다. 이 작품에서 가면은 인간의 본모습을 가리는 허위와 위장의 도구로 활용된다. 본래 가면에 투영되었던 신성한 영력은 획일화되고 익명화된 의식으로 대체된다. 그리하여 가면을 벗고 쓰는 행위를 통해 정치적 억압과 자유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면극의 전통적 미학을 전복시켜 새로운 문법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동시대의 정치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공연이었다.
작품의 내용은 성극으로 써도 될 정도로 성경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의 예수는 단순한 영혼의 구원자라기보다는 ‘해방자’로서의 의미가 강화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정치현실을 다룬 작품에서 늘 써왔던 획일화된 통치가 몸짓을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내용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억압받는 정치적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의 시도와 그 좌절, 희망의 가능성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무언극이다. 쉽게 생각할 때 이는 새로운 양식에 대한 시도로 보일 수 있으나, 만약 대사가 있었더라면 대본을 통해서도 현실을 비판하는 사회적 알레고리의 현실적인 사회적 의미는 쉽게 간파되었을 것이고, 사전의 대본심의에서 버려져 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예 발상 단계에서부터 쓰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무언극이라는 장치는 이러한 정치적 억압의 상황에서 조금 비껴나 작가가 할 말을 하는 한 방법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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