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민정 '해무'

clint 2024. 11. 2. 11:51

 

 

공미리잡이 전진호의 망망대해 속 숨가쁜 항해!
전진호의 성패유무가 달린 조업이 순탄치 않아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조선족 밀항.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조선족과 삼류인생을 벗어나고픈 선원들.
갑판장위의 어색한 조우 끝에 조선족과 한국인이라는 어색한 틈은

동포애로 메워져가는데.... 그들을 뒤쫓는 해경,
해경을 피하면서 만나는 태풍과 조선족들의 질식사 그리고 해무.
바다 한 가운데서 조선족 '홍매'와 순수한 사랑을 시작한 '동식'은

그녀를 지켜주고자 함과 어려움을 함께 동고동락한 선원식구들 사이에서

갈등은 깊어가고 사건은 더 큰 늪으로 빠져가면서

선원들은 나약한 인간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야 마는데.
과연 배 한 척에 담긴 그들의 운명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롤로그와 총 16장으로 구성되었다. '전진호'라는 배를 공간 삼아 조선족 밀항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천승세 작<만선>의 계보를 잇는 해양 사실주의 희곡이다. '전진호' 선장 강성진은 공미리(학꽁치) 잡이가 시원치 않자 큰돈을 받기로 하고 조선족 밀항을 돕는데, 해경과 태풍을 피하려던 과정에서 어창에 숨어 있던 조선족이 모두 질식사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선장과 선원들은 공포와 절망감 속에서 시신을 수장하려한다. 곧 시신이 물 위로 떠오르자 상어를 유인해 이를 처리할 생각으로 시신을 훼손하는 일도 감행한다. 극한 환경에 처한 인간의 절박함과 광기가 보인다.

 

 

 

 

<해무>(김민정 작)는 ‘저주받은 배’의 서사를 사실주의 수법으로 풀어낸다. 해무(海霧)는 바다에 짙게 끼는 안개를 말한다. 바다 한복판에서 해무를 만나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뱃사람들에겐 폭풍우보다 더 무서운 게 해무라고 한다. 연극은 이를 ‘어둠이 아닌 빛 속에서 길을 잃는 공포’로 그려낸다. 그 공포를 실화로부터 길어 올린다. 2001년 밀입국자를 태우고 여수로 들어오던 어선 태창호의 어창(魚艙) 환기구가 막히는 바람에 그 안에 타고 있던 중국인과 조선족이 대거 질식사한 사건이다. 선장 포함 여섯 명의 선원을 태우고 고기잡이에 나선 전진호는 빚더미란 풍랑에 흔들리는 어선이다. 마지막 희망으로 만선의 부푼 꿈을 안고 출항했지만 어망에 걸린 것은 시퍼런 절망뿐. 그때 서해상에 떠있는 중국 배에 타고 있는 조선족 30명을 텅 빈 어창에 실고 한국으로 밀항시켜주면 그 빚을 탕감하고도 남을 돈을 주겠다는 펄떡이는 제안을 받게 된다. 임금은커녕 일터까지 잃게 된 어부들은 이를 자신들의 운명을 건 도박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들을 더 큰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거친 풍랑을 해치며 해경의 추적을 따돌리다가 환기구가 막혀 갑판 아래 어창에 있던 조선족들이 기관실에 있던 한명의 여인을 제외하곤 모두 죽어버린다. 인생역전의 기회를 제공할 듯 하던 황금덩이들이 말 그대로 그들 목줄을 감은 돌덩이로 변한 것이다.

 

 

 

 

연극은 현실보다 더 깊이 파고 든다. 코앞에 닥친 화를 면하기 위해 인간으로선 차마 할 수 없는 범죄를 또 저지른다. 하지만 죄의식은 죄보다 더 무서운 법. 짙은 해무에 갇힌 채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들은 통제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작품은 플롯과 인물 구축, 뱃사람들의 말투와 사투리 구사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극작술을 보여 주며,2000년대에 보기 드문 사실주의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2007년 안경모 연출, 연우무대 제작으로 연우소극장에서 초연했고 이후 수차례 재 공연했다. 초연 당시 '한국 연극 베스트7'에 선정되었고, 2009년 창작 팩토리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작가의 글 - 김민정

2002년 처음 초고 제목은 바람의 덫' 이었는데, '질식'을 거쳐 이제 '해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고민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삶을 이어가는 선원들과 밀항을 선택하는 밀항자들의 삶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여전히 힘든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며 많은 변덕을 부려가며 수정고를 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심 힘드셨을 연출께 죄송하네요. 다만 이 모든 변덕과 수고가 선원과 밀항자의 삶 가까이로 다가가려한 노력이었음을 알아주셨으면 하고요.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살을 붙이고 깊이를 더하는 연습과정에서 제가 놓친 부분들이 많이 채워지리라 믿습니다. 비극은 도처에 깔려있고, 누구라도 그 희생양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 사건에 대한 기사(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밀항하던 25명의 밀항자가 어창에서 질식사하고 선원들이 그 사체를 수장한 사건)를 보며 느꼈던 것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따로 있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이었습니다. 또 과실로 수많은 인명을 죽게 한 선원들의 막막한 심정과 그 사건으로 인해 평생토록 남을 죄책감의 각인이었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고 난 후 남겨지는 것은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죄책감뿐 아닐까요? 죄값을 치르더라도 선상에서 경험한 그 비극적 사건의 경험은 평범한 어부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공연으로 올라가는 '해무'에서 바로 이 '인간'의 냄새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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