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언호 '빙혈'

clint 2024. 10. 29. 14:59

 

 

때는 현대. 겨울. 장소는 한강 얼음판 위이다.
낚시꾼 두 사람이 빙혈(얼음 구멍)에 낚싯대를 넣고 낚시하고 있다.
갑과 을. 갑이 불만이 많다.
자신이 늘 낚시하는 자리에 을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을은 태평하게 세월을 낚는 듯 느긋한 반면
낚시가 안 되는 갑은 툴툴 댄다.
강바람이 매섭게 불고 그 추위에도 낚시꾼은 조용하다.
갑이 일어난다. 안 잡히는 것 보다는 자기 포인트에 앉은
을이 불만인 듯하다. 먼저 돌아가는 갑.
잠시 후, 병이 온다. 역시 낚시꾼 차림이다.
좀 젊은 축에 드는 사내이다. 말이 많은 듯하다. 
그도 을이 앉은 자리를 탐낸다.
을이 좀 전에 한 낚시꾼도 그런 얘길 하더라고 말한다.
자신은 건설 노가다인데 겨울엔 일거리가 없어
낚시를 즐겨하는데 근 보름만에 나온다고 하며      
방한 모를 멋고 머리를 보여준다. 
머리에 상처를 싸맨 듯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한참하는데...
요약하면 보름전에 바로 을이 앉은 그 자리에서
잉어 큰놈을 2마리를 잡았고, 그걸 가지고 요 길목의
매운탕집에 가서 1마리 주고 소주1병과 안줏거리로 한잔 걸치는데 
젊은 놈이 들어와 자기 소주를 말없이 먹더란다. 어이가 없어
싸우고, 돌아와 보니 술병이 비어 다시 잉어 1마리를 주고 소주를
시키고 또 마시는데 다른 젊은 놈이 와선 소주를 훔쳐먹더란다.
또 싸우다가 열받아 소주병으로 치고 받고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가 구류 7일 벌금형인데 돈이 없어 2주 구류살다가 막 나왔단다. 
머리의 상처도 그때 생긴 것이고...
자기 부친도 겨울이면 그 자리에서 낚시를 했단다.
부친은 이곳의 뱃사공이었고. 그러니 그 포인트는 대를 이어
검증된 자리인데, 왜 안잡는지, 못잡는 건지 모르겠단다.
사내는 부인과 아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단다.
이혼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을은 병의 말만 계속 듣고 자신의 말은 거의 않는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병은 궁금하다. 
낚시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실력도 었는 것 같고...
과묵한 을과 떠버리 같은 병은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1973년 월간 현대문학지에 발표된 이언호의 작품이다.
극단 작업에서 공연되었다고 하나 공연 기록이 거의 없다.
1970년대 초 당시에는 실재 한강이 얼면 많은 낚시꾼들이 
빙혈을 뚫어 거기에서 빙어, 잉어, 붕어 등 낚시를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낚시꾼들의 당시의 모습과 을, 병의 대화를 통해
당시의 척박한 생활과 부조리한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언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