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도 잠드는 새벽,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소리를 피해
이곳에 숨어든 이선과 한보는 잠도 잊은 채 누군가를 기다린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여오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한 한보가 떠나버리고,
이선 혼자 남은 공간으로 낯선 부자(父子)가 찾아온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들이 옥수수 밭으로 가는 것을 이선이 목격했다며
그녀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의문스러운 대답만을
남긴 채 죽어버리고, 결국 아들과 이선이 기묘한 공간에 남아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선이 기다리고 있던 한영이가 마침내 나타났을 때,
이선과 아들이 나누었던 비밀스런 연대는 볼품없이 힘을 잃어버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지켜보려는 이선은 뒤늦게 찾아온 그를 어떻게든
무너뜨리려 애쓰는데......
이 작품에는 어딘지 어색한 가족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지키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방어를 위한 폭력성은 순수한 폭력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훨씬 잔인해 진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그 사람을 극단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순수의 주변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광기 어린 짐승의 얼굴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정한 순수는 이제 우리에겐 너무나 자극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진정 원하던 것을 찾았을 때 부서져 버리는 삶. 그런 잔혹한 경로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사랑과 공포가 혼재하는 정서가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지키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연극 ‘옥수수 밭에 누워있는 연인’에서 선명한 것은 거인의 발자국 소리와도 같은 울림과 자유로 상징된 나비다. 나비는 작은 핀으로 박제돼 있다. “그래, 작은 핀을 잘 꽂으면 한동안 나비는 죽지 않아. 하지만 그 핀을 빼고 나면 곧 죽어버리지. 상자 밖으로 나오려고 날갯짓을 계속하다간 몸뚱이가 다 찢겨져 버릴 거야.” 핀이 너무도 가늘고 날카로워 눈치 채지도 못한 나비는 이선을 닮았다. 더불어 한보, 그리고 자유를 꿈꾸는 모두를 닮았다. 이선이 끝없이 무언가로부터 탈출하려는 지점마다 나비의 거대한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이 분다. 붉은 피가 흐른다. 핏방울은 공간을 울리는 공포의 소리로 극대화된다. 모두를 두렵게 하는 그 소리는 아마도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일 것. 숲을 지탱하는 나무가 단번에 넘어지듯, 자유를 꿈꾸는 인간의 무엇이 힘없이 꺾인다. 그 소리가 공포다. 사막 한 가운데서도 살아 버티는 나비를 꿈꾸는 이 연극은 ‘2010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이다.
지경화 작가는 전작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로 2006년 대산 문학상을 받았으며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그를 속박하는 숙명적인 족쇄들. 이 양자 간의 갈등은 천지창조 이래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적 업보가 아닐 수 없다. 나비로 상징되는 자유,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살아 버티는 그 나비를 찾고 바라보면서 저 깊은 절대절망의 사막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젊은 작가의 시선이 무섭기까지 하다. 본 작품의 스타일은 표현주의적이며 현실과 환상성의 조화, 그로테스크한 무드라고 볼 수 있다. 배우들의 대사는 일정부분 리얼하기도 하지만 추상적인 묘사가 많다. 작품이 지닌 스토리라인을 잡아내기도 쉽지 않다. 그러한 특성은 이 작품을 다분히 표현적이며 시적인 세계로 이끈다. 작품이 안내하는 그 시적인 세계는 마치 안개가 짙게 깔린 듯 미스터리 하며 원초적이며 잔혹하며 그로테스크하다. 어둠의 미학이다. 2007년 그 작품을 박근형 연출로 극단 골목길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 베스트 7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평단과 연극인, 관객에게 신선한 인상을 크게 각인시켰다. 지경화 작가는 특별하면서도 잠재력이 충만한 작가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 뒤에 숨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세계를 그려내는데 그녀만의 깊은 사유와 독특한 상상력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점철화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언뜻 보기엔 비정하면서도 비극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만 저 깊은 곳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과 추상을 절묘하게 혼합한 대사처리, 유연한 필치, 탄탄한 구성력, 연극적 상상력, 무대에 대한 이해력 등은 그가 앞으로 우리 연극계에 또 하나의 희망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지경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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