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학교의 교실처럼 보이지만, 사형이 확정된 포로수용소의 당일 사형수 대기실이다.
노인으로부터 장정 그리고 소년에 이르기까지 순번대로 사형당할 사형수의 짧은 대기시간.
모두 전쟁포로이고, 전쟁포로는 무조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가상적인 국가다.
곧 사형될 포로들은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통곡이 아닌 웃음으로 마무리하고 동의하고,
순번 지어 차례로 사형장으로 나가자고 합의한다. 포로들 중 노인은 나이대접을 해달라며
맨 마지막에 집행을 당하도록 해달라고 동료들에게 애원한다.
사형수 한명 한명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것이 자신과 동료에게 웃음이 나오기를 바라고,
또 실제로 동료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비극적 현실에서 희극적인 상황이 잠시 동안
차례대로 전개되고, 그들이 담당병사의 지시대로 차례대로 형장으로 향하면
잠시 후 총성이 울리고 관객은 그 포로가 사형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자신의 차례가 된 사형수에게는 먼저 총살된 사형수 망령이 등장해 주위를 돌며 희롱한다.
이들 속에 소년 사형수가 등장한다. 어리지만 자신도 어엿한 병사였음을 밝힌다.
노인과 소년, 대조적인 인물설정에서 극적 분위기는 상승한다.
남은 포로와 담당 병사의 티격태격 속에 담당병사는 총을 빼앗기고 정복도 빼앗겨
포로복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담당병사의 옷을 입은 포로가 밖으로 나가자
총성이 울린다. 망을 보는 병사가 포로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러나 포로 복을 입고 나간 담당병사 역시 총성과 함께 잠잠해 진다.
마지막으로 남은 노인과 소년, 동등한 입장에서 노인에게 순번을 양보한 소년이
노인에게 하대를 한다. 노인은 당연히 노하지만 소년은 같은 동료끼리 왜 그러느냐며
농담한 거라며 사과를 한다. 소년이 먼저 나가 처형이 되고,
마지막으로 노인이 나갈 차례가 되면 먼저 총살된 사형수들의 망령이 모두 등장한다.
망령들은 노인의 마지막 길을 환송하듯 에워싸고 춤을 춘다.
노인이 정신을 바짝 차리면 망령들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는다.
노인이 애써 웃으며 감옥 밖으로 나가면 총성과 함께 연극은 끝난다.
생에 단 10문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 기도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여기, 처형을 기다리는 여섯 포로가 있다. 어린 소년병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인 이들은 10분마다 한명 씩 밖으로 나가 처형을 당하게 된다. 간수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죽음의 공포가 이들을 옥죄어 온다. 서로를 외면하던 이들의 감방에 소년병이 들어보고, 어른은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며 웃음으로 소년을 위로하던 포로는 가장 행복한 표정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늘 불행한 표정의 사형수만을 보던 사형 집행인은 미소로 가득 찬 첫 번째 죄수의 모습에 감동받고, 자신을 웃기는 사람을 가장 나중에 처형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신이 가장 웃긴다며, 포로들은 농담을 던지기 시작한다.
10분. 남은 다섯 명의 시간을 다 합쳐도 채 한 시간이 되지 않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더 살고자 포로들은 자신이 더 웃긴다며 경쟁 아닌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농담이라는 것도 어울리는 때가 있는 법. 억지로 던지는 농담이 즐거울 리 없다.
극은 아이러니하다. 사형을 집행하면서도 행복감을 느끼길 바란다는 사형 집행인이나 죽는 순간까지 노인을 공경하라며 먼저 죽을 것을 권하는 노인이나, 자신의 농담이 더 재밌다며 서로를 비난하는 포로들이나....죽음 앞에서 보이는 삶에 대한 집착은 비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웃음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웃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은 인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공포와 절망을 웃음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시도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있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아울러 전쟁의 잔혹함도 함께 볼 수 있다. 군인이 되기 전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들. 하지만 이제는 죽음을 기다리는 포로일 뿐이다. 이들이 수감된 곳도 감옥이 아닌 학교 교실이다. 전쟁이 나기 전 이곳은 아이들의 웃음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죽음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어떤 명문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죽음을 맞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 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의례 그렇듯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극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메시지가 명확한데다, 극 내내 농담 아닌 농담들이 범람하지만, 마냥 즐겁게 관극할 수 없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극중 포로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이야기는 한 다큐멘터리로부터 시작됐다. 오세혁 작가는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제주 4.3 사건이 한창이던 때, 여수의 14연대가 제주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궐기는 곧 진압되었고 모두 처형당했다. 나에게 충격을 준 장면은 이들의 웃음이다. 죽음 직전에 울거나 소리치거나 몸부림치지 않고 담배를 피우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천진난만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들의 농담은 처형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지상최후의 농담>은 포로들이 죽기 진전까지 모여 한 명씩 처형될 때까지 그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마지막을 웃기 위해 나누는 농담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를 잊기 위해 그들은 인간만이 창조하고 누릴 수 있는 웃음을 선택한다.
이 공포와 웃음이 뒤섞어 공존해 내며 그 비극과 아이러니를 기획한 이 작품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극과 극의 감정을 대비하여 서로 끌어내 보고자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담아낸 연극이다. 죽음을 앞두고 농담을 하기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인간의 삶과 죽음, 공포와 웃음, 비극과 희극의 양면의 아이러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오 작가의 궁금증을 바탕으로 이 작품은 쓰여졌다. ‘지상최후의 농담’은 포로들이 죽기 직전까지 모여 한 명씩 처형될 때까지 그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마지막을 웃기 위해 나누는 농담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은 인간의 삶과 죽음, 공포와 웃음, 비극과 희극의 양면의 아이러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를 잊기 위해 그들은 인간만이 창조하고 누릴 수 있는 농담(웃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와 웃음이 뒤섞이면서 만들어지는 아이러니한 무대. ‘지상 최후의 농담’은 바로 그 안에서 삶의 본 모습과 의미에 대해 조명한다. 이렇듯 삶과 죽음이라는 소재를 신선한 감각으로 풀어내는 ‘지상 최후의 농담’은 쉼 없이 터지는 웃음 가운데에서 관객들이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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