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동주 작시 이채경 대본 뮤지컬 '서시'

clint 2024. 10. 24. 14:08

 

 

일본인 간호사 요코는 새로운 마루타 병실에 배치된다.
거기서 마루타가 번역하다만 원고를 발견하고 그 원고에 빠져든다.
그리고 급기야 마루타의 환각을 함께 보기 시작하고 
자기 삶을 뒤돌아보는데......
피가 빠지고 바닷물로 채워진 동주는 
자신의 존재가 점점 희미해지는 정체성의 혼돈을 겪다
환각 속 가족과 마주하고 자기로서의 죽음을 맞이한다.
살아남은 요코는 동주의 참회록을 읽으며 자기 삶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동주가 떠난 자리, 
산 자들은 동주의 무명의 시, 서시를 숙제처럼 껴안는다.

 



윤동주가 죽기 하루 전 일어났던 일을 가상하여 쓴 작품이다. 
동주는 죽기 직전까지 몸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당하다 죽었다. 
해수 투입 실험의 부작용 중 하나는 환각. 
죽기 직전 동주가 본 환각은 무엇이었을까? 
죽어가는 환각 속에 펼쳐지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들. 
그리고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윤동주의 시가 아름답게 엮인다.
산자, 요코는 합리성과 이성을 중시하는 일본인 간호사다.
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동주의 시를 읽고 자기가 잃었던 고리를 찾는다. 
새로운 것, 진보에 대한 호기심이 아닌, 인간의 근원적인 그리움이 
인간성을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사람이자, 산 자들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21세기에 윤동주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는 열등감에 뒤덮여 살아간 유약한 인물의 표상이다. 장남이지만 집안이 원하는 의대에 진학하지 않았고,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중학교 때 신춘문예에 이미 등단했던 사촌, 송몽규에 비해 항상 뒤쳐졌으며, 고등학교 입시나 대학입시조차 한번에 붙지 못했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무와 시인이 되고 싶다는 개인적 신념 속에서 끝없이 방황했고 스스로를 자책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시대적 책무를 뒤쫓는 애국열사의 행적을 뒤쫓자는 것이 아니다. 윤동주는 애국열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순수성을 찾는 극도의 개인이다. 하지만 존재적 순수함-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을 지향하는 개인에게 시대가 준 것은 바닷물의 투여였다. 그렇게 그는 피가 묽혀지고 투명하게 사라졌다. 존재를 찾으려 애썼던 인물을 묽혀서 죽은 것만큼 끔찍한 죽음이 어디있는가. 그리고 그만큼 처절하게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는가?
윤동주의 <서시>는 동주의 시가 아니라 현대인들의 시이다. '서시'는 책 앞에 붙는 시를 일컫는 명사일 뿐, 윤동주가 직접 쓴 시 제목이 아니다. 후세인들이 '서문'의 개념으로 시 앞에 붙여진 말일 뿐이다. 그래서 '서시'는 유일하게 윤동주가 직접 쓰지 않은 제목인 셈이다. 그가 시작하는 시로 쓴 서시는 이제 현대인들에게 남은 숙제가 된다.

 


시를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가 - 이채경(작가겸 연출)
이 극은 절대적인 순수를 꿈꾸던 한 개인의 영혼에 관한 극입니다. 폭력적인 시대는 존재적 순수함을 추구하던 한 개인을 물질화하고 그의 영혼을 보지 못합니다. 영혼이란 건 수치화되거나 기록될 수 없으니까요. 시인 윤동주조차 흐르는 시대 속에서 하나의 몸, 마루타였을 뿐. 그의 영혼은 피를 뽑고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 속에서 묽혀져 죽었습니다. 모든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성과 합리의 그늘 속,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나 당연히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야하고, 발전을 위해 기억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 는, 물질 속에 살아있는 영혼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부끄러워하고, 그리워하는 바로 그것. 지금 이 시점에 윤동주를 다시 읽어야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가장 순결한 영혼의 결정체.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적도, 시대를 슬퍼한 적도 없다'고 고백하는 윤동주는 민족시인도, 독립운동가도 아닌, 지극한 순수를 지향하는 지극한 개인일 뿐이었습니다. 지극한 개인이 오롯한 인간일 수도 없는 세상 속,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를 뮤지컬로 하겠다는 생각을 한 지 근 5년 만에 공연을 올립니다. 2011년부터 1년에 한 고씩 썼지만, 윤동주의 시 옆에 나란히 있는 말들이 너무 조잡하고 부끄러워 버리기를 여러 해. 뮤지컬이고 뭐고 모르겠다. 거의 작품을 포기할 때 즈음, 남은 대본이 21페이지. 연습을 하다보니 심지어 16페이지로 줄어들었습니다. 무대는 달랑 침대 하나...... 
두렵고 부끄러운 맘 앞섭니다. 부족한 깜냥에 대한 자괴감과... 왜 연극을 하는지, 왜 나는 나여야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반복되는, 쉽게 해결되지 않지만 놓치면 안되는 질문들을 안고... 이렇게 부끄럽게 살아있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에, 타인이란 존재가 있으니 나란 존재도 있는 것이기에, 더, 더 부끄럽게 살아가겠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 묽어지지않는 영혼을 위해.... 함께 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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