뮐러가 쓴 대부분의 작품이 줄거리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며,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어 있지 않는다. 뮐러가 '89년 연출해 공연했었던 공연시간 7시간의 대작 <햄릿머신>은 대본분량이 7페이지를 넘지 않았다. 너무나도 할 이야기가 많다보니 딱 한마디 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작가가 의미한 <햄릿머신>은 말그대로 전승받아 해석하기 보다 <햄릿머신> 그 자체가 권력이며 머신이기에 불사조, 즉 권력은 영원하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권력의 군상을 해체, 분리하는 번거로운 작업을 하려 한 것이다. 권력 군상의 상징적인 조형물과 과거와 현대를 잇는 낡고 썩은 다리를 오가며, 다양한 권력의 머신, 즉, 광대와 독재자와 변절자와 기회주의자적 권력자의 본모습이 얼키고 설키는 상반관계로 묘사되며, 권력구조의 결론을 찾는 미로행진의 작품이다.
역자의 글 - 윤시향(원광대 독문과 교수·연극평론가)
20세기 최대이자 최후의 극작가라고 불리우는 하이네 뮬러의 햄릿머신은 소위 근대극의 들을 완전히 깨트리고 있다. 철저하게 파격적인 이런 형식의 희곡은 이제까지 없었기 때문에 발표당시에는 공연이 불가능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쾰른에서의 초연은 연습으로 끝나고 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 과정을 쓴 것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기존의 희곡이라면 장면과 장소, 시간들이 제시되어 있어야 하고 대사가 있어야 할 텐데 이 곡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무시되어 있다. 어디까지가 대사인지 독백인지 지시문인지 전혀 구별이 없다. 그러나 뮐러가 갖는 강한 언어의 힘과 선명한 극적 이미지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작품을 읽어 나가는 동안 서서히 떠오르게 되고 따라서 종래의 희곡이라는 정형을 파괴한 후의 새로운 극형식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근대적 의미로서 작품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지 않은 대신, 미래예견적인 단편적 이미지가 여기저기 나타난다. 공연대본이면서도 공연을 거부하고 있는 듯한 불가해성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 이야기하는 화자 및 작중인물, 햄릿의 변질, 변신, 대본과 이야기와의 무경계 상태, 인용, 패러디, 은유등이 혼재해있는 작품이 바로 「햄릿머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이 희곡은 세계각국의 수많은 연극인들에 의해 공연되었고 현재도 공연 되고 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햄릿머신이> '공연 욕망'을 자극하는 어떤 힘을 발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뮬러는 엄청난 독서량의 이며 여러 분야에 정통한 학자작가이다. 그는 모든 이론에 정통하며 암시적이며 시적인 언어 구사력에도 비상한 재능을 보여주기 때문에 흔히 마법적인 그의 언어를 '뮐러'라고 부른다. 뮐러의 작품에는 브레히트의 교육극적 영향은 물론, 베케트의 부조리극, 아르또의 잔혹극, 푸코를 위시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후기 구조주의, 회랍고전의 신화적 소재와 고대 비극의 코러스 형식, 셰익스피어의 비극인물 구성에서의 갈등구조 등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외에도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문학의 영향을 비롯하여 사상적으로도 니체, 프로이드, 칼 슈미트 등 의 흔적도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개인사와 세계사가 경험, 지식과 뒤섞여서 이루어진 "기억의 집장체"로서의 뮐러의 연극이며 특히 「햄릿머신」은 암호와 수수께끼로 모아진 텍스트이다. 원래 80여페이지에 달하던 분량을 9페이지의 대본으로 압축, 집약시켜 놓았으니 이 회곡의 "읽기"에는 암호 해독장치가 필요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뮬러의 극작태도는 작가의 사회적 책임의식에 서 유래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나는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부담시켜서 그들이 우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게 하고 싶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유의 경직성과 고착화를 깨트리기 위해 불안과 공포, 혐오둥을 사용하는 "경악의 미학" 역시 수용자에 의 영향력 행사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절망으로 부터의 탈출은 도피가 아니라 절망과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현대 드라마의 기념비적 작품이며 난해의 극치라고 불리우는 <햄릿머신>의 한국 공연은 그 공연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연극이 죽은 후 새롭게 떠오르는 연극, 가능성을 넓혀가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을 얼마나 깊이 동감하는가가 지표인듯한 이 작품의 공연은 현 한국연극의 현실을 되집어볼 때 더욱 그렇다고 하겠다. 감각적인 상업주의에 편승해 관객의 사고를 잠재우는 연극이 유행하는 지금, 이 '골치아프고 까다로운' 작품의 공연은 한국의 연극계에 얼마나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초연 연출의 글 - 채승훈
햄릿머신은 부패한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고통스런 몸부림을 굿이라는 형식 안에 용해시키는 방식으로 연출되었다. 당시의 공연은 원작의 '경악의 미학'을 철저하게 구현했으며 의미가 훼손됨 없이 한국화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새로운 형식의 진보적인 연극 '본격적인 포스트모던 실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이너 뮐러의 햄릿머신은 충격과 경악, 그리고 난해함으로 널리 알려진 희곡이다. 이는 충격과 경악은 역사를 부패와 살육의 연속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서 연유한다. 또한뮐러 자신이 인간의 어떤 집단도 경악 없이, 충격 없이는 결코 무언가를 배우지 못했다"고 진술하면서 연극이 경악을 통한 배우기가 되어야 한다는 미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희곡의 난해함은 독일어 판으로 밖에 되지 않는 분량에 방대한 인용과 진술 주체의 불명확성, 시제의 중첩, 이질적인 장면과 이미지의 조합 등 전통적인 극형식을 벗어난 구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희곡이 담고 있는 복잡한 정보와 정서를 정리해 보면 이 작품은 의외로 매우 선명한 하나의 주제, 즉 부패한 역사 앞에 선 지식인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햄릿은 인식과 행동의 불일치를 보이는 실패한 지식인의 전형이며, 살육과 난도질로 점철된 역사 앞에 고통스럽게 자신을 응시하는 인물이다. 동독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뮐러가 겪었던 고뇌는 한국은 물론 현재의 독일에서도 그대로 무대화될 수 없다. 연극은 언제나 현재형이며 이곳에서 의미를 생산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연은 크게 세 단계의 작업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처음의 단계는 연출가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으로, 배우들만의 리허설이다. 이 단계는 대본 분석을 포함하여 배우들이 대본을 몸으로 읽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리허설의 장점은 책상에 앉아 토론만 할 때와는 달리 대본의 모든 요소들이 연습과정에서 배우의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는 점이다. 이 단계 의 연습은 사실 작품의 난해함 때문에 많은 어려움 가운데 진행되었다. 다음 단계는 연출가가 작품의 초점을 모아가는 과정이었다. 넘쳐나는 정보 단위들을 취사선택하면서 형태는 단순화시키고 힘은 축적해 갔다. 이런 과 정에서 공연의 형태는 93년 초연과 매우 흡사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작 업에서는 가급적 대사를 모두 행위화하는 데에 노력이 모아진 점이다. 연습 진행 도중 초연의 영향권 내에 머무르는 시기를 잠시 겪기도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대사가 더 분해되어 소리가 되고 반복된 행위의 패턴 이 나타나자 초연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감이 획득되었고, 굿판에 여백이 생겼 다. 그래서 강렬한 에너지와 압도적인 분위기로 일관했던 초연과는 달리, 여유있 게 흐르는 에너지 속에 정서의 응축과 풀어짐 넘나들고 단순함 속에 복잡함이 자 리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들은 어른거리는 촛불 아래서, 일상의 반듯함 심층에 놓인 비틀린 실체와 마주하며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지 않는 연극을 경험 다. 그리하여 우리가 텍스트에 숨을 불어 넣은 것처럼 관객 열 에서 새로 숨을 불어넣은 텍스트를 읽게 될 것이다
<하이네 뮐러>
1929년 동독 출생. 극작가, 연출가. 어린시절 이 념과 체제, 혁명앞에서 가족간의 이별과 혁명으 로 인해 투옥중인 아버지를 언제나 그리며, 전형 적인 사회주의 작가로 성장했다. 90년대 최고의 극작가, 연출가로 평가받고 있는 하이네 뮐러는 데뷔 당시 자신의 조국인 동독에 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후 로버트 웰숀 등을 포함한 세계 실험연극인 들에게 새로운 실험연극의 방향성을 제시, 프랑 스에서부터 하이네 뮐러의 돌풍이 일기 시작하여 미국, 러시아, 일본, 이탈리아 등 전세계의 실험 연극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햄릿머신>, <메디아 메두티알>, <퀘르테트>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하이네 뮐러 텍스트집 1, 2, 3>, <게루마니아 베를린의 죽음>, 그리고 자서전으로 <싸움없는 전쟁> 등이 있으나, 국내에는 아직 출판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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