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테르는 마을 무도회에서 롯데를 만나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운명적인 사랑을 예감한다.
롯데에게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베르테르는 롯데의 집을 방문하는데...!
롯데는 베르테르에게 우정의 표시로 책과 리본을 선물한다.
베르테르는 그것을 사랑의 징표로 생각하며 열정에 사로잡히고!
한편 도시로 나갔던 알베르트가 돌아오자 베르테르는 실의에 빠진 채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베르테르에게 롯데의 결혼 소식이 들리고
다시 만난 롯데는 베르테르에게 차갑기만 한데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사랑은 더욱 깊어간다.
이를 부담스러워하던 롯데는 베르테르에게 더는 찾아오지 말라 한다.
한편 베르테르와 친한 하인이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번민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베르테르는 그를 위해 변론을 하지만
결국 그 하인은 처형된다.
낙심하여 살아갈 희망을 찾지 못하는 베르테르!
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롯데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롯데는 작별인사만을 건넨다.
베르테르는 여행을 빙자하여 알베르트에게 호신용 권총을 빌리고
끝내 목숨을 끊는다.
괴테가 베츨라에서 친구의 약혼녀 샤를롯데를 사랑한 그 고뇌를
유부녀를 사랑하다 권총 자살한 친구 벨헤름 예루살렘의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쓴 일기체 소설이다.
이 소설에 의해서 괴테는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독일문학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순수한 감정과 몽환적인 꿈을 지닌 청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문제로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로 구상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 라이프 치히에서 출간됨과 동시에 유럽의 문학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 등지에서 속속 번역본이 출간되면서 세인의 주목을 끌었고 도처에서 숱한 모작과 해적판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죽도록 괴로워하던 청년들은 베르테르의 복장을 하고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도 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처럼 살았고, 그렇게도 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처럼 죽어갔다. 가히 유럽 전체가 이른바 <베르테르의 열풍>에 휩쓸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전 유럽의 시선은 무명의 청년 괴테에게로 집중되었다.
도대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어떤 소설일까...?
도시의 번잡함에 지쳐버린 베르테르의 영혼이 드디어 그 도시를 떠나서 발하임의 목가적 자연 속에 머무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발하임의 아름다운 5월, 아름다운 자연은 순수한 영혼들의 서식지로서 베르테르의 편지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베르테르의 독자들이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동안, 베르테르는 아름다운 발하임의 숲에서 호메로스의 <오딧세이>를 읽는다.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영혼의 교향악처럼 그의 편지는 감정의 리듬을 타고 서정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은 <편지>의 형태로 쓰여진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좋았던 옛날의 희랍을 그리워하고, 풀벌레들의 움직임에서 신의 섭리를 예감하며,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영혼을 사랑하고, 온갖 소시민적 용렬함을 단호히 경멸하고, 외적인 학식이나 지위보다는 내면의 감정과 마음을 훨씬 더 중요시하는 청년이 바로 베르테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베르테르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롯데를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롯데에게는 불행히도 약혼자가 있었다는 것, 그래도 자신들의 사랑의 순수성을 끝없이 믿었다는 것, 그리고 그 순수성을 그 어떤 방식으로든 증명해보이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베르테르가 선택한 것이 죽음이었다는 것...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죽도록 사랑하고, 죽어서라도 그 사랑을 유지하고자 하는 극단적이고, 때로는 병적으로 보일 정도의 순수함. 이것은 괴테의 문학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이다. 사랑과 죽음, 순수함과 병적 징후, 이것들이 직물의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가 너무나도 촘촘히 얽혀 있어서, 그 어느 하나라도 빼놓으면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죽음과 사랑>이라는 문제를 고도의 서정성으로 압축하여 주제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 것이다.
각색의 변 - 고선웅
명작을 각색한다는 건 곤혹스런 일이다. 작품의 미덕을 온전히 유지해봐야 본전인 셈이고 그 조차 못하면 그야말로 애써 매를 번 격일 테니 말이다. 해서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작심한 것이 선무당이다. 괴테公께서 착잡께나 하셨을 테다. 당신께 송구한 마음과 경의를 표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간체 소설이다. 1771년 5월 4일부터 1772년 12월 23일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에 벌어진 일을 서술하고 있다. 화자는 주인공 자신인 베르테르며 친구인 빌헬름과 사랑하는 연인 로테에게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폈다. 일인칭서술이고 화자는 나(ich)다. 하지만 2부의 뒷 부분에 나오는 편집자가 독자에게라는 부분에서 역시 그 '편집자'도 나(ich)'다. 둘 모두 똑같은 '나'라고 하는 일인칭으로 작품 속에서 서술자가 말하고 있지만 둘은 동일인물이 아니다. 베르테르의 언어는 서정과 감정이 지나칠 정도로 충만하다. 반면에 편집자가 독자에게 에서 사용된 언어는 객관적이다. 각색자로서 고민스러웠던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언어들로 가득한 명작소설을 무대라는 공간에서 뮤지컬로 어떤 기준에 의해 재생산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문제는 그 기준이었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소설적 문법에는 어울릴지언정 뮤지컬 언어로는 부적합한 부분이 있었다. 뮤지컬은 주고 받아야 하고 무대에 어울리는 극적관계들이 있어야 하는데 원작은 짧은 만남 긴 사색이 주류다. 따라서 각색을 하려면 짧은 만남을 길게 정리해야 하고 긴 사색을 간단히 노래로 처리해야만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의 전사, 혹은 전사를 추적해서 설득력 있는 인물로 무대에 현존시켜야 했다. 그러다 보니 괴테가 긴밀하게 구축해 놓은 암시나 복선 혹은 주옥같은 제재들도 경우에 따라선 축약하거나 불가피하게 생략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또 전술한데로 작품은 20개월 가량의 이야기인데 뮤지컬은 2시간 안팎에 그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관되면서도 원작의 미덕을 오손하지 않고 소설에 감동한 독자들이 불쾌해 하지 않을 만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좁은 소견으로는 그 소설에서 사랑이라는 테마만을 옮기는 것이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베르테르가 피력했던 봉건사회에 대한 저항과 고뇌, 혹은 귀족과 시민의 갈등은 덜어내고 생각해보자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18세기의 계급성을 우리 뮤지컬에서 굳이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거기에다 원작에서 미루어 짐작할 만한 몹씬(mob scene)을 끼워 넣어 뮤지컬적인 구색을 맞추고 베르테르와 롯데, 알베르트의 삼각관계 축을 형성했다. 삼각관계는 진부하지만 뮤지컬에는 효과적인 구조였다. 그러면서 원작에 나타나있는 알베르트를 베르테르와 갈등할 수 있는 성격으로 다소 뒤틀었다. 원작에서는 알베르트가 이성적이고 젠틀한 이미지여서 베르테르의 광적인 사랑을 고뇌로 이끌게 하는 인상이 강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직간접적인 가해를 어느 정도 하므로써 극적 실마리를 꿰어 가도록 인물에 네가티브한 성격 을 부가시켰다. 그리고 카인즈(하인)에 대한 성격을 베르테르의 또 다른 자아로 규정하고 극적 긴장을 그의 죽음으로 초점 하였다. 베르테르의 죽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두고두고 고민거리였다. 베르테르가 자살하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만든다면 그것은 원작에는 충실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결말로는 너무 비극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암시만을 줄 수 있는 방법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떠나가길 바랐다. 어찌됐든 나는 개인적으로 원작에 충실하려 노력했고 소설의 미덕이 뮤지컬에서 더욱 빛나기를 원한다. 그 결과가 어떨런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인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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