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백남 '운명'

clint 2024. 8. 14. 05:33

 

 

 

무대는 하와이의 호놀룰루.

직업이 전도사(傳道師)이기 때문에 서양사람과 교섭이 많고,

무엇이고 서양 것이라면 덮어놓고 숭배하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딸 박메리는 사진에서만 본 남자를 찾아 하와이로 간다.

그녀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출신의 인텔리 여성으로 일본 유학생인

애인 이수옥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려고 했지만

서양을 동경하는 허영 때문에 결국 하와이로 와서 양길삼과 결혼한다.

그런데 양길삼은 나이 많은 구두수선공으로 전혀 교양이 없는 자였다.

얼마 후 이수옥이 미국 유학차 하와이를 들르게 되었을 때 박메리를 만난다.

그는 여자가 사기결혼을 당했음을 안다.

한편 이 옛 애인을 만나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한 양길삼의 친구는

여자를 위협, 정조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남편에게 알린다.

노기충천한 양길삼은 이들이 만나고 있는 현장을 급습하여

일대 격투가 벌어지는데 격투 중 양길삼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으려던

이수옥이 잘못하여 그 칼로 양길삼을 죽인다.

결국 이수옥은 유학의 꿈도, 애인과의 재결합의 희망도 무산된 채 감옥으로

가야할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1918년에 씀. 1921년 예술협회에서 창립공연을 가졌다.

이기세(李基世) 연출. 1930년 출간.

그릇된 기성윤리와 유교(儒敎)의 폐습이 낳은 부권(父權) 남용을 고발하고

밀려오는 해외 사조(思潮)에 맹목적으로 영합하는 젊은이에게 경각심을 주어

새로운 도덕과 양속(良俗)을 일으키자는 개화기의 희곡이다. 

 

 

 

 

 


줄거리
막이 열리면 박메리는 혼자 먹은 저녁 설거지를 마친 후 한숨을 쉬고 공상에 잠겨 있다. 잠시 후 등장한 이웃집 여인 갑은 그러한 메리를 위로해 주느라고 그녀의 잠재적 능력을 추켜세워 준다. 여인 갑이 보기에 신여성은 학문이 있어서 신여성인 메리는 ‘혼자라도 벌어먹을 수가 있으며’, ‘혼자 벌어도 남편보다 날 것’이라고 여긴다. 여인 갑은 이번에는 다른 여인의 운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중매쟁이에게 속아 시집온 신여성 김서방댁은 바람이 났다는 오해를 받고 도망치려다 누군가의 제보를 받고는 칼을 들고 쫓아 온 남편에 의해 살해된다.
김서방댁은 ‘학문이 있어서’ 하와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결국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죽은 자만 다를 뿐 김서방댁과 박메리의 운명은 결국 동일한 것임을 이 장면은 암시해 준다. 이에 대한 박메리의 반응은 차라리 덤덤하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되려 편할지도 모른다’는 체념의 태도를 보여 줄 정도로 박메리의 처지는 암담하다. 이에 비할 때 쥐꼬리를 가져다 보여 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즐겁게 떠들어 대고 돌아가는 여인 갑의 삶은 오히려 건강하고 활기차다. 여인 갑에게 못 배운 것은 그의 삶에 하등 약점이 될 수 없다. 결국 김서방댁과 박메리는 자승자박의 운명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신여성이 기댈 수 있는 교육적 혜택이라는 것이 고작 수신제가의 교양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 그러면서도 서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만 커져서 가슴속의 허영심을 단호히 잘라 낼 수 없었다는 것이 이들이 처한 운명적 질곡의 한 원인이 된다. 농장의 인부 감독이자 양길삼의 친구인 장한구가 이수옥이 퇴장한 뒤 은근히 박메리에게 무엇인가 ‘불의의 추행’을 제안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일은 그전부터 간간이 계속되어 온 듯한데, 이 날따라 이수옥과의 만남을 목격한 후 이를 기회로 그 제안의 압력의 정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메리는 그러한 장한구의 추행을 단호히 징치하지도 못하고, 남편에게 실토하지도 못한다. 아마도 역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부정행위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신여성에 대한 일반의 시선은 ‘모던 걸’에 대한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윤백남의 희곡 「운명」은 바로 이러한 ‘사진결혼’의 희생자인 신여성 박메리의 기구한 운명을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진결혼의 폐해가 위와 같이 신문 지상에 소개되고 극화되기까지 한 것을 보면 이러한 일이 1915년 이후에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를 극화한 「운명」이 1920년대 이후 몇 차례 공연되었음은 당대의 관객이 이 작품의 내용을 현실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방증해 준다.
1920년경 「운명」의 박메리가 사진결혼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梁吉三은 1905년 이전에 하와이로 건너간 청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아마도 30대 중반이 넘었을 것이다. 하와이에서 한국인 청년 노동자가 10년 이상 살면서 결혼을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마땅한 한국인 배우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쉽게도 작품 속에서는 양길삼의 나이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는 어린이가 아닌 청년의 나이 때 태평양을 건넜음에 틀림없다. 결국 여학교를 갓 졸업한 박메리와는 10년 이상의 연차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부부간의 갈등의 한 요인은 여기에도 있을지 모른다. 「운명」의 李秀玉이 “黃金에 눈이 어두어셔 約束헌 男子를 져바리는 것”이 사랑이냐고 박메리를 비난하는 문맥은 이러한 점에서 이해가 된다. 또한 「운명」에 등장하는 남성 한국인 이민들의 직업이 양화수선업자(양길삼), 제당회사 인부 감독(장한구) 등이고 대사 속에서 언급되는 주위 사람들의 직업이 ‘다이아몬드 농원에 다니는 박서방’, ‘전등회사에 잇는 최서방’ 등으로 매우 다양해졌음을 엿볼 수 있다. 단지 노예적 농업 노동만은 면했다는 이유로 이들은 자신의 경제력이 고국의 일부 젊은 여성들에게 과장되어 전해지기를 적극 바랐을 것이다.
이러한 젊은 여성들은 주로 중매쟁이의 꾐에 빠져서 사진결혼을 선택하였다. 「운명」에서, 사탕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서방에 의해, 여객선 갑판 위에서 칼에 찔려 죽은 김서방댁이 바로 중매쟁이한테 속아 들어 온 경우에 해당한다. 이와 반면 「운명」의 박메리처럼 자신의 의지가 어느 정도 개입된 상태에서 사진결혼을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봉건적 질곡을 벗어나 아메리카라는 신세계로 향하는 행운의 수단으로 먼저 하와이를 선택한 것이다. 이 역시 개화기 이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신여성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사항이다.

 

 

 

 

실제로 1910년부터 1924년까지 무려 700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사진결혼을 통해 혼인했다. 당시 시 대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운명’은 연극사와 우리 근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기록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주민 부부의 갈등을 통해 당대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과정, 종교생활, 자유연애의 등장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나아가 작품은 단순히 근현대 희곡을 재해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진신부들의 육성을 작품에 담아 당시 신문 기사를 활용하며 시대와 작품의 흐름을 함께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하와이 이민과 사진결혼이란 아픈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연극 '운명'은 원작에서 나아 가 이주의 문제까지도 다루고 있다. 당시 사회문제의 폐해를 연극으로 고발하려 했던 원작의 모습처럼 새롭게 태어난 '운명' 또한 과거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필름과 전시 같은 현대적인 방식을 통해 재현한다.